2016년 4월 24일 일요일

나의 산티아고記-4

산티아고를 향해 가는 800km의 길 위에서는 많은 낯선 이들을 만난다. 그리고 길고 짧은 동행 끝에 자연스럽게 헤어지기도 한다. 삶에서 무수히 겪는 이 만남과 헤어짐이 새삼 놀라울 것은 없지만, 카미노에서는 만남도 헤어짐도 인생 전체에서 겪는 것에 비해 짧은 순간에,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숙소인 알베르게에서 옆 침대에 누워 아침을 맞으며, 험한 산길을 오르느라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낯선 순례자들과 만나게 된다. 맥주 한 잔으로 마른 목을 축일 때, 우유를 넣은 커피 카페 콘 레체를 사이에 놓고 인사를 나누고 친구가 되는 그 경험은 카미노에서 경험하게 되는 큰 즐거움이다. 하지만 그런 친구들과 언제 다시 보게 될지, 혹은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 될지 알 수 없어서 간혹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기도 했다.

다시 보지 못할 줄 알고 작별인사를 나누었는데, 다음날 마주치게 되었을 때의 쑥스러움과 반가움에 익숙해질 무렵, 다음 마을 어딘가에서 만나리라 생각했지만 볼 수 없게 된 친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이메일 주소라도 물었어야 한다고, 아니 사진이라도 한 장 남겼어야 한다고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간혹 카미노 길 위에는 뒤에 오고 있을 누군가를 향해 남겨진 메시지를 종종 볼 수 있었다. "너를 만나게 되어 참 행복했어. 혹시 나에게 연락해 줄 수 있겠니" 이런 쪽지가 순례자들의 눈길을 끌곤 했다. 그렇게 가슴 설레는 풋풋한 만남은 아니지만 나 역시 다시 만날 약속 없이 헤어져 버린 사람들, 그래서 더 아쉽고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산티아고를 거의 50km도 채 남겨 놓지 않았을 때 만난 알버트 신부님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우리가 말을 나누게 된 것은 도로 아래로 난 터널을 통과할 때였다. 방향을 알려주는 노란 화살표가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리는 내 뒤를 따라오던 그는 함께 노란 화살표를 찾다가 인사를 건네 왔다. 어디서 왔냐는 그의 질문에 나는 언제나처럼 한국사람이지만, 인도에서 왔다고 소개를 했고, 그는 자신이 보르네오에서 왔다고 했다. 연로해 보이는 백인 할아버지가 보르네오에서 왔다니 흥미가 생겨 그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50년 넘게 보르네오에서 살며 원주민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돕고 있는 알버트 신부님은 원주민들이 지어준 왕콥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개구리를 뜻한다나 뭐라나.

나는 내가 다람살라에서 살고 있고 티베트 난민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나만큼이나 반가워했는데, 나는 신부님에게 내가 항상 궁금하던 것, 나 자신에게 언제나 묻고 있던 질문을 처음으로 입밖에 내어 물어보았다. 그것은 내가 하는 일이 정말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지였다. 내가 도움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삶에 불필요한 참견을 하고, 그들이 원하지 않는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분은 내게 어떤 사회라도 변하고 있다고, 심지어 보르네오의 원주민들도 이제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하려 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네가 아니더라도 그들은 변화 속에 있는 것이라고, 너는 남을 돕는다는 최고의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아직 젊으니까(!) 인내심을 갖고 gentle하게 해나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네덜란드 출신인 신부님은 50년 전 처음 보르네오를 갈 때 배를 타고 한 달도 더 걸려 도착했다고 한다.  처음 그가 신부가 되겠다고 했을 때 반대했던 아버지도 이젠 돌아가셨고, 자신도 70이 넘어 은퇴를 했다. 하지만 아직도 보르네오에 살고 있고, 처음 신부가 되었을 때부터 오고 싶었던 카미노 길을 이제야 걷는 것이라고 했다. 다행히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기 때문에 올 수 있었다고. 이젠 나이가 들어 체력이 부치기 때문에 200km 남짓만 걷는 중이지만 하루에 15km 이상은 걷지 않기로 정하고 느긋하고 여유 있게 길을 걷고 계셨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으니까, 남들처럼 서둘러서 걸을 필요가 없지."라고 하셨다.

산티아고를 향해 가는 800km의 길 위에서는 많은 낯선 이들을 만난다. 그리고 길고 짧은 동행 끝에 자연스럽게 헤어지기도 한다. 삶에서 무수히 겪는 이 만남과 헤어짐이 새삼 놀라울 것은 없지만, 카미노에서는 만남도 헤어짐도 인생 전체에서 겪는 것에 비해 짧은 순간에,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숙소인 알베르게에서 옆 침대에 누워 아침을 맞으며, 험한 산길을 오르느라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낯선 순례자들과 만나게 된다. 맥주 한 잔으로 마른 목을 축일 때, 우유를 넣은 커피 카페 콘 레체를 사이에 놓고 인사를 나누고 친구가 되는 그 경험은 카미노에서 경험하게 되는 큰 즐거움이다. 하지만 그런 친구들과 언제 다시 보게 될지, 혹은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 될지 알 수 없어서 간혹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기도 했다.

다시 보지 못할 줄 알고 작별인사를 나누었는데, 다음날 마주치게 되었을 때의 쑥스러움과 반가움에 익숙해질 무렵, 다음 마을 어딘가에서 만나리라 생각했지만 볼 수 없게 된 친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이메일 주소라도 물었어야 한다고, 아니 사진이라도 한 장 남겼어야 한다고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간혹 카미노 길 위에는 뒤에 오고 있을 누군가를 향해 남겨진 메시지를 종종 볼 수 있었다. "너를 만나게 되어 참 행복했어. 혹시 나에게 연락해 줄 수 있겠니" 이런 쪽지가 순례자들의 눈길을 끌곤 했다. 그렇게 가슴 설레는 풋풋한 만남은 아니지만 나 역시 다시 만날 약속 없이 헤어져 버린 사람들, 그래서 더 아쉽고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산티아고를 거의 50km도 채 남겨 놓지 않았을 때 만난 알버트 신부님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우리가 말을 나누게 된 것은 도로 아래로 난 터널을 통과할 때였다. 방향을 알려주는 노란 화살표가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리는 내 뒤를 따라오던 그는 함께 노란 화살표를 찾다가 인사를 건네 왔다. 어디서 왔냐는 그의 질문에 나는 언제나처럼 한국사람이지만, 인도에서 왔다고 소개를 했고, 그는 자신이 보르네오에서 왔다고 했다. 연로해 보이는 백인 할아버지가 보르네오에서 왔다니 흥미가 생겨 그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50년 넘게 보르네오에서 살며 원주민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돕고 있는 알버트 신부님은 원주민들이 지어준 왕콥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개구리를 뜻한다나 뭐라나.

나는 내가 다람살라에서 살고 있고 티베트 난민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나만큼이나 반가워했는데, 나는 신부님에게 내가 항상 궁금하던 것, 나 자신에게 언제나 묻고 있던 질문을 처음으로 입밖에 내어 물어보았다. 그것은 내가 하는 일이 정말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지였다. 내가 도움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삶에 불필요한 참견을 하고, 그들이 원하지 않는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분은 내게 어떤 사회라도 변하고 있다고, 심지어 보르네오의 원주민들도 이제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하려 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네가 아니더라도 그들은 변화 속에 있는 것이라고, 너는 남을 돕는다는 최고의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아직 젊으니까(!) 인내심을 갖고 gentle하게 해나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네덜란드 출신인 신부님은 50년 전 처음 보르네오를 갈 때 배를 타고 한 달도 더 걸려 도착했다고 한다.  처음 그가 신부가 되겠다고 했을 때 반대했던 아버지도 이젠 돌아가셨고, 자신도 70이 넘어 은퇴를 했다. 하지만 아직도 보르네오에 살고 있고, 처음 신부가 되었을 때부터 오고 싶었던 카미노 길을 이제야 걷는 것이라고 했다. 다행히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기 때문에 올 수 있었다고. 이젠 나이가 들어 체력이 부치기 때문에 200km 남짓만 걷는 중이지만 하루에 15km 이상은 걷지 않기로 정하고 느긋하고 여유 있게 길을 걷고 계셨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으니까, 남들처럼 서둘러서 걸을 필요가 없지."라고 하셨다.

댓글 2개:

  1. 언니의 진정한 카미노 천사가 아니였을까요? 전해 들은 두분의 대화는 참 인상적이 었어요
    저에게도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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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나의 야고보 성인이신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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