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30일 토요일

나의 산티아고記-5


'나는 누구인가'라는 끝없는 물음

산티아고 순례를 마치고 한국에 갔을 때다. 오랜 지인이 물었다.
"그래, 그렇게 오래 걸어보니 뭘 느꼈어?"
"내가 어떤 인간인지 좀 더 알게 되었어요."
"그건 거기까지 안 가도 알 수 있는 거 아니야?"
"글쎄요. 거기에서 알 수 있는 '나'가 또 있더라고요."

인간의 최대 관심은 자기 자신이다. 인간은 자아를 정립하고 단단히 다져가는 데 인생의 전반부를 쓰고, 그렇게 단단해진 자아를 파악하고, (필요한 경우) 해체해 다시 정립하는 데 인생의 후반부를 쓴다. 그러니까 10대 이후 30대 중반까지 스스로 나에게 물었던 "나는 어떤 인간인가"라는 질문은 무의미했다. 오히려 "나는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가"라고 물었어야 했다는 걸, 이미 어떤 종류의 인간이 되어버린 이후에야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 나는 뒤늦은 감이 있지만 내가 누구인지, 어떤 인간인지 알아가고 있다.

물론 그보다 뒤늦게 자아의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어떤 인간이 되어, 어떤 삶을 살아야지 라는 자각 따윈 없이 어느새 자아는 형성되어 버린다. 헤세의 표현대로라면 완전한 인간이 아닌 채, 반은 물고기이거나, 반은 동물인 채 인간으로서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인생의 어느 순간 '난 누구지, 내 인생은 무슨 의미가 있지'라는 치명적인 질문을 (참으로 실수에 가깝게) 던지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알게 된 나는 고통 앞에서, 낯선 상황에서, 고독 속에서 손쉽게 민낯을 드러냈다. 안다고 생각한 나는 전부가 아니었고, 굳건해 보였던 자아의 외투는 옷을 벗어던졌다. 그것이 단지 고통이나, 고독 같은 극한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그곳에서 무엇을 '증명하거나' 포장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고, 남에게 줄 관심따윈 없었다.

유일한 나의 관심은 매일매일 걷는다는 사실, 그리고 그 행위와 무관하게 끝없이 마음에 차오르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뿐이었다. 온전히 그 질문 앞에 설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시간이었다. 

2016년 4월 24일 일요일

나의 산티아고記-4

산티아고를 향해 가는 800km의 길 위에서는 많은 낯선 이들을 만난다. 그리고 길고 짧은 동행 끝에 자연스럽게 헤어지기도 한다. 삶에서 무수히 겪는 이 만남과 헤어짐이 새삼 놀라울 것은 없지만, 카미노에서는 만남도 헤어짐도 인생 전체에서 겪는 것에 비해 짧은 순간에,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숙소인 알베르게에서 옆 침대에 누워 아침을 맞으며, 험한 산길을 오르느라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낯선 순례자들과 만나게 된다. 맥주 한 잔으로 마른 목을 축일 때, 우유를 넣은 커피 카페 콘 레체를 사이에 놓고 인사를 나누고 친구가 되는 그 경험은 카미노에서 경험하게 되는 큰 즐거움이다. 하지만 그런 친구들과 언제 다시 보게 될지, 혹은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 될지 알 수 없어서 간혹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기도 했다.

다시 보지 못할 줄 알고 작별인사를 나누었는데, 다음날 마주치게 되었을 때의 쑥스러움과 반가움에 익숙해질 무렵, 다음 마을 어딘가에서 만나리라 생각했지만 볼 수 없게 된 친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이메일 주소라도 물었어야 한다고, 아니 사진이라도 한 장 남겼어야 한다고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간혹 카미노 길 위에는 뒤에 오고 있을 누군가를 향해 남겨진 메시지를 종종 볼 수 있었다. "너를 만나게 되어 참 행복했어. 혹시 나에게 연락해 줄 수 있겠니" 이런 쪽지가 순례자들의 눈길을 끌곤 했다. 그렇게 가슴 설레는 풋풋한 만남은 아니지만 나 역시 다시 만날 약속 없이 헤어져 버린 사람들, 그래서 더 아쉽고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산티아고를 거의 50km도 채 남겨 놓지 않았을 때 만난 알버트 신부님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우리가 말을 나누게 된 것은 도로 아래로 난 터널을 통과할 때였다. 방향을 알려주는 노란 화살표가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리는 내 뒤를 따라오던 그는 함께 노란 화살표를 찾다가 인사를 건네 왔다. 어디서 왔냐는 그의 질문에 나는 언제나처럼 한국사람이지만, 인도에서 왔다고 소개를 했고, 그는 자신이 보르네오에서 왔다고 했다. 연로해 보이는 백인 할아버지가 보르네오에서 왔다니 흥미가 생겨 그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50년 넘게 보르네오에서 살며 원주민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돕고 있는 알버트 신부님은 원주민들이 지어준 왕콥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개구리를 뜻한다나 뭐라나.

나는 내가 다람살라에서 살고 있고 티베트 난민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나만큼이나 반가워했는데, 나는 신부님에게 내가 항상 궁금하던 것, 나 자신에게 언제나 묻고 있던 질문을 처음으로 입밖에 내어 물어보았다. 그것은 내가 하는 일이 정말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지였다. 내가 도움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삶에 불필요한 참견을 하고, 그들이 원하지 않는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분은 내게 어떤 사회라도 변하고 있다고, 심지어 보르네오의 원주민들도 이제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하려 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네가 아니더라도 그들은 변화 속에 있는 것이라고, 너는 남을 돕는다는 최고의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아직 젊으니까(!) 인내심을 갖고 gentle하게 해나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네덜란드 출신인 신부님은 50년 전 처음 보르네오를 갈 때 배를 타고 한 달도 더 걸려 도착했다고 한다.  처음 그가 신부가 되겠다고 했을 때 반대했던 아버지도 이젠 돌아가셨고, 자신도 70이 넘어 은퇴를 했다. 하지만 아직도 보르네오에 살고 있고, 처음 신부가 되었을 때부터 오고 싶었던 카미노 길을 이제야 걷는 것이라고 했다. 다행히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기 때문에 올 수 있었다고. 이젠 나이가 들어 체력이 부치기 때문에 200km 남짓만 걷는 중이지만 하루에 15km 이상은 걷지 않기로 정하고 느긋하고 여유 있게 길을 걷고 계셨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으니까, 남들처럼 서둘러서 걸을 필요가 없지."라고 하셨다.

산티아고를 향해 가는 800km의 길 위에서는 많은 낯선 이들을 만난다. 그리고 길고 짧은 동행 끝에 자연스럽게 헤어지기도 한다. 삶에서 무수히 겪는 이 만남과 헤어짐이 새삼 놀라울 것은 없지만, 카미노에서는 만남도 헤어짐도 인생 전체에서 겪는 것에 비해 짧은 순간에,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숙소인 알베르게에서 옆 침대에 누워 아침을 맞으며, 험한 산길을 오르느라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낯선 순례자들과 만나게 된다. 맥주 한 잔으로 마른 목을 축일 때, 우유를 넣은 커피 카페 콘 레체를 사이에 놓고 인사를 나누고 친구가 되는 그 경험은 카미노에서 경험하게 되는 큰 즐거움이다. 하지만 그런 친구들과 언제 다시 보게 될지, 혹은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 될지 알 수 없어서 간혹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기도 했다.

다시 보지 못할 줄 알고 작별인사를 나누었는데, 다음날 마주치게 되었을 때의 쑥스러움과 반가움에 익숙해질 무렵, 다음 마을 어딘가에서 만나리라 생각했지만 볼 수 없게 된 친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이메일 주소라도 물었어야 한다고, 아니 사진이라도 한 장 남겼어야 한다고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간혹 카미노 길 위에는 뒤에 오고 있을 누군가를 향해 남겨진 메시지를 종종 볼 수 있었다. "너를 만나게 되어 참 행복했어. 혹시 나에게 연락해 줄 수 있겠니" 이런 쪽지가 순례자들의 눈길을 끌곤 했다. 그렇게 가슴 설레는 풋풋한 만남은 아니지만 나 역시 다시 만날 약속 없이 헤어져 버린 사람들, 그래서 더 아쉽고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산티아고를 거의 50km도 채 남겨 놓지 않았을 때 만난 알버트 신부님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우리가 말을 나누게 된 것은 도로 아래로 난 터널을 통과할 때였다. 방향을 알려주는 노란 화살표가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리는 내 뒤를 따라오던 그는 함께 노란 화살표를 찾다가 인사를 건네 왔다. 어디서 왔냐는 그의 질문에 나는 언제나처럼 한국사람이지만, 인도에서 왔다고 소개를 했고, 그는 자신이 보르네오에서 왔다고 했다. 연로해 보이는 백인 할아버지가 보르네오에서 왔다니 흥미가 생겨 그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50년 넘게 보르네오에서 살며 원주민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돕고 있는 알버트 신부님은 원주민들이 지어준 왕콥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개구리를 뜻한다나 뭐라나.

나는 내가 다람살라에서 살고 있고 티베트 난민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나만큼이나 반가워했는데, 나는 신부님에게 내가 항상 궁금하던 것, 나 자신에게 언제나 묻고 있던 질문을 처음으로 입밖에 내어 물어보았다. 그것은 내가 하는 일이 정말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지였다. 내가 도움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삶에 불필요한 참견을 하고, 그들이 원하지 않는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분은 내게 어떤 사회라도 변하고 있다고, 심지어 보르네오의 원주민들도 이제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하려 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네가 아니더라도 그들은 변화 속에 있는 것이라고, 너는 남을 돕는다는 최고의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아직 젊으니까(!) 인내심을 갖고 gentle하게 해나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네덜란드 출신인 신부님은 50년 전 처음 보르네오를 갈 때 배를 타고 한 달도 더 걸려 도착했다고 한다.  처음 그가 신부가 되겠다고 했을 때 반대했던 아버지도 이젠 돌아가셨고, 자신도 70이 넘어 은퇴를 했다. 하지만 아직도 보르네오에 살고 있고, 처음 신부가 되었을 때부터 오고 싶었던 카미노 길을 이제야 걷는 것이라고 했다. 다행히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기 때문에 올 수 있었다고. 이젠 나이가 들어 체력이 부치기 때문에 200km 남짓만 걷는 중이지만 하루에 15km 이상은 걷지 않기로 정하고 느긋하고 여유 있게 길을 걷고 계셨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으니까, 남들처럼 서둘러서 걸을 필요가 없지."라고 하셨다.

'오래된 미래'의 땅, 라다크로 떠난 2주일

'오래된 미래'의 땅, 라다크로 떠난 2주일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 라다크에서 배운다'는 환경과 생명을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기념비적인 지침서가 된 책이다. 1991년에 발간된 이 책은 인도 북부 잠무 카슈미르 주의 한 지역인 라다크에서 저자가 겪은 전혀 다른 문명을 다루고 있다. 언어학 연구를 위해 라다크를 찾은 그녀는 문명과 세계를 바라보는 자신의 관점이 라다크에서의 삶을 통해 완전히 바뀌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나 자신은 그 책을 통해 삶의 관점을 바꿀 수 있었다. 어쩌면 당신도 라다크와의 만남으로 삶이 바뀔지도 모른다. 



라다크로 가는 길
살고 있던 다람살라에서 라다크로 가기 위해 출발한 것은 2014 7 25일 밤이었다. 마날리로 가는 버스를 타고 8-9시간을 달린 끝에 새벽녘의 마날리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바시쉿의 노천 온천에서 목욕을 한 것이었다. 우기인 탓에 실안개비가 내리는 야외 온천은 제법 그럴싸해서, 욕조가 없는 인도생활에서 갖기 힘든 온몸을 담그는 귀한 기회를 만끽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목욕으로 시작한 마날리 체류 이틀 후, 오락가락하는 빗줄기 속에서 라다크의 수도 레로 떠나는 버스에 올랐다. 10인승 미니버스, 템포라고 흔히 불리는 이 버스는 라다크까지 1 2일로 달린다. 한밤중에 출발해서 당일 밤에 도착하는 1일짜리 버스도 있었지만, 급격히 높아지는 고도에 적응하고, 체력을 비축하려면 하루 정도 쉬어가는 것도 좋다는 주변의 조언에 따른 것이다. 중간에 여유롭게 감상할 수 있는 풍경은 덤.

지난 겨울 내린 후 여태 녹지 않은 거대한 잔설들을 옆에 끼고 3980m의 로탕 패쓰를 넘어 첫날 도착한 곳은 지스파 캠프. 사실 아침 7시 반이 넘어 출발한 버스가 그곳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가 되기 조금 전이었다. 중간에 점심 식사니 여권 검사니 해서 가진 휴식 시간을 고려하면 인도 여행 치고는 무척 짧은 여정인 셈이다. 그래도 숙소로 주어진 텐트에서 내내 휴식을 취하고 저녁이 되어서야 바깥을 둘러보러 나올 정도로 피곤했다. 생각보다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진 텐트에서의 하루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다시 출발. 차는 여전히 아슬아슬한 산길을 마구 내달렸다. 조금만 실수를 하면 굴러떨어질 것 같은 까마득한 산골짜기에서 애써 눈을 돌려 아름다운 장관을 펼쳐보여주는 먼산들로 눈을 돌린 채 달린지 한참, 오후가 다 되어서 마날리와 레를 잇는 도로 중 가장 높은 고개인 타그랑 라에 도착했다. 5328m라고 적힌 표지석과 주위를 둘러싼 오색의 룽타(티베트 불교 문화에서 사용되는 경전이 적힌 빨강, 파랑, 노랑, 하양, 초록색의 깃발)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 발을 내딛는 순간 어느새 현기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고산병 약을 먹어둔 탓인지 심하게 힘들지는 않았지만 공중에 30cm 정도 떠 있는 듯한 어지럼증과 가벼운 호흡곤란이 찾아왔다. 이런 때는 몸을 사리는 것이 최고. 급하게 몇 컷 찍고 차로 돌아와 금세 출발하긴 했지만, 같은 차에 타고 있던 뉴질랜드 친구는 결국 창밖을 향해 토하고 말았다.
카루에서 마지막 여권검사를 마치고 점차 모습을 드러낸 레. 초록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는 길과 그 옆을 흐르는 시냇물이 지금까지의 황량한 풍경과는 다르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마침 얼마 전에 끝난 티베트 불교의 최대 행사라는 칼라차크라를 알리는 깃발과 달라이 라마의 얼굴이 그려진 현수막이 아직 남아있어 축제의 도시에 들어서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사방 어디를 둘러 보아도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 너무나 투명하고 맑은 정경에 태양이 바로 곁에서 내리쬐는 듯한 이곳이 바로 그 땅이었다. ‘오래된 미래’는 과연 이곳에 있을까.

라다크 청년들의 대안적인 삶, SECMOL과의 우연한 만남.
레에서의 이른 아침, 식사를 위해 거리로 나섰다. 게스트 하우스와 호텔, 여행사들이 몰린 창스파 거리는 메인 바자르와 연결되어 많은 외국인들이 거리를 지나는 곳이다. 마땅한 식당을 찾아 두리번 거리던 우리의 눈에 띈 곳은 '김치'라는 단어가 한글로 쓰인 자그마한 가게 겸 카페. 신기한 마음에 들어서니 살구 잼, 피클 같은 음식 뿐만 아니라 라다크어 어린이 책을 함께 파는 작은 가게였다. 작년부터 티베트어 동화책을 발행하기 시작한 록빠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이런 저런 질문을 던지자 마침 자리에 앉아있던 50대 서양 여성이 답을 해주었다. 베키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 여성은 지난 20년 동안 라다크의 Secmol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그동안 라다크어 책 출판, 청년들을 위한 대안기술학교 운영 등 많은 일들을 해 왔다고 소개했다. 라다크의 대안기술학교라니 귀가 번적 뜨여 방문이 가능한지를 물어보니 언제라도 찾아가면 된다고 한다. 더욱이 바로 다음날이 일년에 한번 학교의 학생들이 살구잼을 만들러 소풍을 가는 날이라며 동참해도 된다고 먼저 말하기까지 했다.
택시를 타고 찾아간 세크몰은 레에서 한 시간 가량 떨어진 페 빌리지에서 5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마치 기다린 듯이 젊은 여학생이 다가와 반갑다며 이곳저곳을 안내해 주기 시작했다

세크몰은 1988년에 설립된 라다크의 비영리단체로, 라다크의 교육 체계를 바꿔나가기 위해 설립되었고, 현재는 라다크 청년들의 활동을 활성화 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직접 방문한 세크몰은 말 그대로 미래를 열어가고 있었다. 대부분의 활동이 학생들의 자율적인 관리와 운영으로 이루어지는 세크몰에는 대학 진학 이전의 학생들인 파운데이션 스튜던트와 대학을 다니고 있는 컬리지 스튜던트가 40여명 있었다. 컬리지 스튜던트는 레에 있는 대학에 재학중인데 각자의 전공과 학년에 따라 세크몰에 머무는 시간이 동일하지는 않았다. 세크몰 캠퍼스에는 학생들이 수업을 받고, 공동 활동을 하는 공간과 기숙사, 도서관, 컴퓨터실 등이 있고, 직접 가꾸는 농장, 소를 키워 바이오 가스를 만드는 축사와 순환형 화장실, 세면장이 있었다. 학생들이 돌아가며 직접 요리를 하는 주방바깥으로는 태양열 조리기와 오븐이 설치되어 있고, 멀리 인더스 강변에는 태양열 발전기가 설치되어 세크몰의 전기를 공급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미래지향적인 대안기술을 캠퍼스 전체에 구현되어 있는 곳이었다. 여름 동안의 긴 해를 활용하기 위해 세크몰은 자체적인 섬머 타임을 실시하고 있었다. 소위 세크몰 타임은 인도 표준시간보다 한시간을 당겨서 시행되고 있었는데, 활발한 외부 활동이 가능한 여름 시간을 활용하는 데 적절해 보였다. 학생들은 다음날 있을 살구 잼 만들기 행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해 보였다. 학교 교장인 린첸은 자신이 학교의 졸업생이기도 했다. 캠퍼스를 안내해준 스탄진은 레에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세크몰에서의 생활을 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라다크의 미래를 열어가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세크몰의 주된 활동은 페 마을의 이 캠퍼스를 통해 청년들의 대안 교육을 담당는 일과, 출판, 교육 개혁활동, 청년 캠프 그리고 태양열 에너지 활용 워크샵 등이 있다. 다음 날 일박 이일로 진행된 살구잼 만들기 행사는 2시간 가량 떨어진 알치 곰파에서 진행되었는데, 겨울 동안 먹을 살구잼을 직접 만드는 실질적인 목표 외에도 학생들이 함께 즐기는 소풍의 성격을 함께 띤 행사였다. 이 행사는 약 십여년 전부터 살구를 수확할 인력이 줄어들어 감당하지 못하게 된 알치 사원의 요청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살구는 수확해 가되, 대신 오일을 짤 수 있는 씨앗은 사원에 남겨주는 조건으로 해마다 진행되는 세크몰의 야외 행사이다. 낮동안 살구를 따고, 부지런히 잼을 만든 학생들은 저녁 식사후 해가 지자 전통음악을 틀어놓고 즐겁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남녀가 함께 춤을 추는 쑥스러움도 별로 없이 함께 어울려 즐겁게 춤을 추는 학생들의 활달한 모습을 보니 이들이 만들어갈 라다크의 미래도 그렇게 활기찰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은 세크몰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유명한 사원인 라마유르로 향했다. 대중교통이 끊겼다는 마을 사람들의 말에 걱정을 하며 고속도로까지 나가자 어디선가 나타난 트럭이 우리를 태워주었다. 레에서 스리나가르까지 과일을 운송하는 이 트럭을 운전하는 페로즈 칸은 무슬림으로 여름 내내 레와 스리나가르를 오가며 일을 하고 있었다. 그의 덕분에 편안히 목적지인 라마유르에 도착해 숙소를 잡았다. 내가 자신의 여동생을 닮았다며 반겨주는 주인 아주머니의 환대에 푸근함을 느끼며 찾은 라마유르 사원은 사원 자체도 아름다웠지만 사원에서 바라보는 라마유르의 모습도 무척 아름다웠다.

사원 뒤편을 돌아 내려오는 길에 만난 쿤촉 스님은 명상 수행중이라 수염과 머리칼을 길게 기르고 있었는데, 남인도의 티베트 사원에서 7년 동안 공부를 했기 때문에 티베트어로 간단한 대화를 나눌 수가 있었다. 평상시에는 350명 가량이 머문다는 라마유르 사원에는 지금은 조금 줄었다고 한다. 마침 라다크 지방을 다니며 의약품을 전하고 지방 사람들을 돕고 계신 청전스님이 바로 전날 다녀가셨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어 흐뭇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 버스를 타고 다시 레로 돌아왔다. 두시간이 조금 넘는 거리를 달려왔지만 높은 고도에서 움직이기 때문인지 하루에 한 개만 일정을 소화해도 피곤함이 더 심한 것 같았다. 덕분에 다음날까지는 레에서 휴식을 취하며 다음 일정인 판공초 행을 준비하기로 했다. 다만 한 가지 일정이 남아 있었는데, ‘오래된 미래’의 저자인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설립한 라다크 에콜로지 센터(LEDeG) 방문하는 것이 었다.


10여년 전 라다크를 처음 알게 되고, ‘오래된 미래’를 읽어본 이후 줄곧 가보고 싶었던 곳을 드디어 방문하게 된 것이다. 센터에서는 매일 오후 2시부터 영화 ‘오래된 미래’와 ‘행복의 경제학’을 교대로 상영하고 있었다. 우리가 방문한 날은 ‘오래된 미래’를 볼 수 있었는데, 제법 많은 외국인 여행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영화 ‘오래된 미래’에서는 책에서와 같이 현대의 물질 문명이 들어가기 전의 라다크의 삶에 대한 고찰과 문명과의 접촉을 통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극히 제한된 자원과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공동체의 구성원들끼리 자연스럽게 협력하고, 순환하는 삶의 방식을 지켜온 라다크 사람들이 서구 문명과 만나면서 스스로가 가난하다고 여기고 자동차를, 오토바이를, 화려한 도시를 부러워하게 된 것이다. 일가족이 사는데 충분한 땅을 가지고 가족이 함께, 나아가 지역 사회의 이웃들과 함께 농사를 통해 생활을 이어가던 라다크 사람들이 도시로 나와 빈민으로 전락하고, 람보를 흉내내는 청소년들의 모습은 슬픔까지 느끼게 했다. 그러나 희망은 있었다. 20여년 전에 찍어진 이 영화는 가장 최근에 덧붙여진 30분 분량의 새로운 버전을 통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라다크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인도 정부는 정책을 통해 라다크 지역을 유기농업 지역으로 정해 지원하고 있고, 라다크를 정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LEDeG나 세크몰과 같은 단체들은 라다크 지역에서 대안기술을 통해 화석 연료의 사용을 줄이고 있고, 특히 청년들과 이런 노력에 대한 공감과 실천을 이루어 나가고 있었다. 세크몰의 학생들을 보면서도 느꼈지만 자신들의 문화에 자부심을 가지고, 환경을 지켜나가려고 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며 라다크의 미래가 밝다고 느꼈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우리와 같은 외국인이 와 있다는 것 자체가 라다크를 파괴하는 것인가’라는 한 관객의 물음에 진행을 맡은 알렉스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그런 과정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오히려 외국인 관광객들이 보여주는 라다크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 그리고 존중이 라다크의 젊은 세대들에게 자부심을 갖게 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내가 보았던 라다크 청년들의 자부심과 자신감이 바로 그런 데서 오는 것인지도 몰랐다. 비록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말했던 ‘오래된 미래’의 그 모습 자체는 아닐지라도 라다크는 자신들의 ‘미래’를 자신들의 방식으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지프를 타고 판공초로 향했다. 7시간 가량 걸려 도착한 판공초는 아름다운 물빛으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유명한 인도 영화 ‘세 얼간이 Three Idiot’에 등장해 더욱 많이 알려진 이 곳은 인도인들도 즐겨찾는 관광지다. 침대가 세 개 놓여있는 간단한 오두막 숙소가 가장 싸고, 편의시설을 갖춘 텐트나 목조 펜션도 있었는데 가격은 천차만별이었다. 우리가 묵은 곳은 그 곳에 있는 유일한 티베트인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덕분에 관광객들의 지프나 미니버스를 몰고 온 티베트인 운전사들은 대부분 그 곳에 묵는데, 부엌에 모여 음식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어울려 티베트어를 배우면서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했다. 운전사들 중 가장 연장자인 한 아저씨는 64년생인데 자신이 어릴 때는 학교에 다닐 여유가 없이 돈을 벌어야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대부분이 부모 세대에 티베트에서 넘어온 이들에게 라다크에서의 삶은 여전히 녹록치 않아 보였지만, 맥주 한잔으로 낮의 피로를 날리는 그들은 따뜻하고 즐겁게 저녁식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날은 우리만의 은밀한 일정이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호숫가에서 별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밤이 되자 기온이 내려가 쌀쌀해졌지만 맨바닥에 숄을 깔고 누워 별자리도 찾아보고, 별똥별도 구경했다. 유난히 밝은 달이 별구경을 조금 방해했지만, 11시가 넘어 달이 진 후 하늘을 가득 메운 별들을 보고 나서야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해돋이를 보려 호숫가에 나온 관광객들을 뒤로 하고, 판공초를 떠났다.
돌아오는 길은 여느 여행자들처럼 레로 바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마침 판공초에서 레로 오는 길목에 있는 탁톡 사원에서는 파드마 삼바바를 기리는 축제가 열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하루 묵어가기로 했다. 여행사의 도움으로 현지 학교에서 근무하는 티베트인 선생님의 관사를 무료로 하루 빌리게 된 것이다. 주방이 딸린 작은 방은 학교가 위치한 삭티 마을이 다 내려다 보이는 멋진 전망이 일품이었다. 아무 댓가도 없이 친구의 부탁으로 낯선 외국인들에게 방을 내주다니 우리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자리를 비우는 자신을 대신해 안내를 맡아준 동료 선생님까지 모두들 친절하기 짝이 없었다. 초모라는 이름의 이 선생님은 티베트인이지만, 라다크인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딸만 셋인 집의 맏이라 그런지 어른스러움이 물씬 배어났다. 휴식도 미루고 구경하러간 사원의 축제에는 외국인들을 포함한 관광객들이 많았다. 화려한 옷과 가면을 쓰고 나온 축제의 등장 인물들은 시선을 모았고, 입구부터 늘어선 노점상들이 축제의 분위기를 더해주었다. 저녁을 대신해 와이와이 라면을 끓여먹고 낯선 곳에서의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레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중간에 헤미스 곰파에 들를까 하는 생각이 있었지만 역시나 체력 부족을 느끼고 레로 돌아왔다.

어느새 레에서의 일정이 거의 끝나가는 날. 마지막 일정으로 레 팰리스에 들르고, 그동안 눈여겨 봐 두었던 물품들을 사모았다. 라다크 특산품인 살구로 만든 오일과 크림, 그리고 말린 시금치와 잼 같은 먹거리를 샀다. 마날리에서 올 때와는 달리 돌아가는 여정은 새벽 1시에 출발해서 당일 저녁 무렵 도착하는 1일짜리 버스를 탔다. 생각보다 일찍 마날리에 도착한 버스 덕에 원래의 계획과 달리 당일 저녁 버스로 다시 다람살라로 복귀할 수 있었다. 고산 지대에서 며칠을 보내 몸이 단련된 탓인지 이틀 연이은 장거리 버스 여행에도 생각보다 지치지 않고 돌아올 수 있었다.



긴 여행을 돌아보고 나니 새삼 얼마나 귀한 기회를 가졌는지 실감하게 된다. 많은 친절을 베풀어준 사람들, 잊고 있던 소중한 가치를 일깨워준 사람들, 라다크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단체들. 내가 앞으로 어떤 삶의 방향을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준 고마운 스승들이었다. 처음 ‘오래된 미래’와 라다크를 알게 된 후 가져왔던 꿈과 마음 속의 여행이 이제야 일단락이 지어진 것이다. 내 인생을 바꿔준 라다크와의 만남, 이제 정말 내 인생을 바꿔주었다. 이제 이 글을 읽은 당신의 인생이 바뀔지는 당신의 몫이다. 언젠가는 라다크를 만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