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24일 화요일

[고독한 책읽기] 2. 바람의 기록 / 박경희


옆방에 사는 지혜 씨가 자신의 스승님의 친구인 한국분이 쓰신 거라며 책을 줬다. 여기 한국인들이 많이 오는 식당이나 카페에 기증하고 있는데 록빠 카페에도 놔달라는 거였다. 그래서 내가 가장 먼저 읽게 되었는데, 2007년 무렵 맥간에 왔던 한 남성이 그때 만나 티베트어를 배우던 티베트 여성을 6년이 지난 후 꿈에서 떠올리고 그녀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얘기다. 그녀를 힘들게 찾아내지만 티베트를 위해 분신을 결심한 그녀를 막지 못하고 그 모습을 목격하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소설적으로 잘 쓰였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평가하지 못하겠다. 그런 평가를 하기 이전에 마지 내 가족이나 친구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책을 읽는 것처럼 감정이 이입되어,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내가 밥을 먹던 식당, 내가 걷던 거리, 내가 만났던 듯한 사람들, 내가 겪은 것 같은 사건들… 그런 속에서 마지막 주인공 여성이 분신하는 대목은 마음이 한없이 아팠다. 언젠가는 티베트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 역시도 글로 쓰고 싶었지만, 그 이야기가 결국은 아프고 슬플 것이라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아쉬움이 있다면 좀 더 구체적인 각각의 티베트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았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개별적 존재의 구체성을 상실할 때 인간성 역시 상실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나에게는 이 이야기가 슬프고 마음이 아프지만, 티베트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얼마나 생생하고 구체적인 것으로 마음에 다가올지 모르겠다. 

‘그들의 이름을 불러 주라’ 
나치에 희생된 유태인들을 기리는 예드 바쉠 Yod Vashem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예드 바쉠이란 '이름을 기억하게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곳에는 희생자들의 이름, 살았던 곳, 태어난 곳 등 그들에 관한 모든 기록이 보관되어 있다. 그들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사랑하고, 질투하고, 노래하고, 춤췄던 사람이었음을, 개성과 역사와 기억을 지닌 존재였음을 기억할 때에만 우리는 그들에게 깊이 공감할 수 있다. 그들을 희생자 일반, 어느 국민 일반, 계층 일반으로 만들 때 우리는 그 개별성을 놓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 자신과 그들 사이의 깊은 연관성 역시 잃어버리는 것이다. 2차 대전 당시 그토록 많은 희생을 겪었던 유태인들이 지금은 팔레스타인에 떨어지는 폭탄을 불꽃놀이 마냥 즐기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지금의 유태인들에게는 팔레스타인인들의 개별성이, 인간성이, 이름이 불려지지 않는다. 그저 추상으로서의 악, 위험 그 자체이며, 자신들과 단절되고 절멸시켜야 할 어떤 것인 것이다.

안네의 일기가 그토록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사랑받았던 것은 그 이야기가 특별해서가 아니다. 그 당시 나치를 피해 많은 사람들이 숨어 지내고, 힘든 시간을 혹은 더 참혹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의 일기를 통해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한 인간, 한 소녀를 만났고 그녀의 고통, 절망, 소녀다운 사랑과 희망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네는 더 이상 이름 모를 수백만의 유태인 희생자 중 하나의 숫자가 아니라 우리가 아는, 공감하고, 사랑하는 한 어린 소녀가 되었다.

우리가 진정으로 마지막까지 해야 할 일은 세상의 이름 없이 사라지는 것들, 존재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지켜보아주고, 불러주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2016년 5월 15일 일요일

고독한 책읽기-1 지지 않는다는 말 / 김연수

열심히 책을 읽던 시절이 있다. 지금보다 한참 젊을 때다. 그때는 주로 소설을 읽었다. 그러다가 점점 나이가 들면서 소설이 아닌 책을 읽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도입부에 책만 읽는 언니를 보며 따분해진 앨리스가 나온다. 앨리스의 표현에 따르면 언니는 '그림도 대화도 없는 책'을 읽고 있다. 그 책에 내가 등장했다면 나도 아마 앨리스를 따분하게 만들었으리라.

소설가들께는 미안하게도 소설보다는 인문학 책과 산문집을 선호하게 되었는데, 김연수의 '지지 않는다는 말'도 산문집이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도 몇 권 읽었지만, 다시 미안하게도 소설보다는 산문이 내 스타일이다.

"그러다가 어느 결엔가 이 우주가 참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됐는데, 그 순간 나는 고독을 경험했다. 고독은 전혀 외롭지 않았다. 고독은 뭐랄까, 나는 영원히 살 수 없는데 이 우주는 영원히 반짝일 것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의 감정 같은 것이다." - 도시에 공급하는 고독의 가격을 낮춰 주기를 中

이 감정을 나는 완벽히 이해했다. 아니 완벽히 경험했다. 중학생 시절, 우주와 시간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단순히 상상이 아니라 무한한 우주의 이미지와 그 안에서 티끌이 되어 사라지는 나, 그리고 내가 존재하기 전에도, 후에도 아무런 상관없이 무한하게 펼쳐지는 시간의 흐름을 공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느낌이 고독이라는 걸 이 책을 보고 알았다. 하지만 중학생이던 나는 그저 두렵기만 했고, 두려움을 설명도, 이해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울면서 잠이 들었다.

이제는 우주의 무한과 내 존재의 유한을 생각해도 그렇게 두렵기만 하지는 않다. 윤회를 믿거나 구원을 기다려서는 아니다. 어차피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체념 때문만도 아니다. 그보다는 비록 티끌에 불과하지만 나 자신이 이 우주의 일부라는 것을, 그래서 우주의 어딘가를 끝없이 여행하리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 것 같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 다람살라는 서울은 물론이고 한국의 어지간한 곳보다 별을 쉽게 볼 수 있는 곳이다. 1800미터에 가까운 해발 고도와 히말라야의 맑은 공기 탓이다. 어느 날 밤 자다 깨어 무심코 발코니에 나가 하늘을 올려다본 적이 있다. 무수한 별들이 머리 위로 펼쳐져 있었는데, 이들이 분명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방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누워서도 나를 감싸고 있는 별들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 나는 혼자였지만 그것이 고독이라면, 전혀 외롭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만난 적도 없는 사람과 완벽하게 감정을 공유하는 일이 책읽기에서는 발생한다. 김연수는 내게 그런 작가다.

2016년 5월 13일 금요일

고독한 책읽기-0 시작하며

김현의 책 [행복한 책읽기]가 출간된 것이 1992년이라고 한다. 내가 그 책을 읽은 것도 아마 그 무렵일 것이다. 출간 소식을 듣고 찾아서 사 본 것으로 기억한다.

나의 책 읽기, 혹은 책 일기를 시작하며 뭐라고 이름을 붙일지 생각하다 행복한 책읽기도, 또 어느 티브이 프로그램인지, 누군가의 책 제목인 즐거운 책읽기도 모두 좋았다. 하지만 그 제목을 그대로 갖다 쓰고 싶지는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게 책읽기는 참으로 고독한 시간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이 자신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내게는 참 소중한 시간이다.

나를 자신 속으로 들어가게 할 수 있는, 고독한 책읽기의 시간이 기다려진다. 

2016년 5월 12일 목요일

나의 산티아고記-7

아야코와 츠요시, 그리고 나의 마리아 님

"너는 카미노를 왜 걷게 됐니?"
산티아고로 가는 길에 흔히 주고받는 질문이다.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어서, 가톨릭 신자라서, 예전부터 와보고 싶어서 등등 많은 이유를 접할 수 있다.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마지막으로 순례를 마쳤다는 증명서를 발급받을 때도 종교, 영성, 스포츠 등의 순례 이유를 고르게 돼 있다. 그러니까 누구나 당연하게도 집과 가족, 친구를 떠나 스페인의 시골길을 수백 킬로미터씩 걸을 때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하지만 나는 그들만큼 분명하고 간절한 이유를 가진 순례자는 만나지 못했다. 아야코와 츠요시 부부.

두 사람을 알게 된 건 일본어가 능통한 윤 선생님 때문이었다. 이미 나와는 안면이 있던 윤 선생님이 한국 중년 남자분 두 분과 일본인 커플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 우연히 합석을 하게 됐다. 다들 길을 걷다가 만난 사이이다. 그 자리에서 인사를 나누게 된 일본인 부부가 바로 아야코와 츠요시다. 10살 차이가 나는 이 부부는 영어도 잘 못하고, 걷기도 잘 못했지만 씩씩하게 길을 걷고 있었다. 유난히 속도가 빠른 한국의 조 선생님(중년 남자 분 중 한 분이었는데 정말 잘 걷는 분이었다.)을 첫날부터 만나, '저 사람만 놓치지 않으면 우린 잘 하고 있는 거야'라며 서로를 다독이며 걸어왔다고 한다. 남들보다 걷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더 일찍 출발하고 늦게 까지 걷는다는 그들은 저녁이 되어 숙소에서 조 선생님을 마주치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활달한 아야코와 점잖고 소탈한 츠요시를 보고 '좋은 사람들이구나' 했을 뿐 특별한 점은 느끼지 못했다.

얼마 후 윤선생님께 들은 그들 부부의 이야기에 따르면 두 사람이 순례를 떠난 이유는 츠요시의 병을 낫게 해달라는 기원을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평상시엔 괜찮지만 평생 앓아야 하는 병이었다. 일본에서 버거 프랜차이즈의 점장과 아르바이트 생이로 만난 아야코와 츠요시는 아야코의 적극적인 대시로 결혼에 이르렀다. 물론 츠요시의 병에 대해서 알고도 한 결혼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산티아고로 가는 이 길을 걸으며 기도를 하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순례에 나섰다. 전날 묵은 성당에서 나눠준 십자가 목걸이를 정말 기쁜 표정으로 걸고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로 길에서 마주치는 그들이 더 반갑고 궁금했는데, 그들은 여전히 조 선생님을 자신들의 성 야고보(산티아고에 묻힌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성인. 산티아고라는 말이 성 야고보라는 말이다.)라고 부르며 열심히 그분을 찾아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졸지에 성 야고보가 된 조 선생님은 다소 난감한 표정이긴 했지만.

반가운 마음이야 다른 순례자들을 만날 때나 진배없지만, 아니 사실 조금 더 반갑고, 꼭 순례를 잘 마쳐서 정말로 병이 낫기를 바라게 되었다. 비록 일본어를 못하는 나와 영어를 못하는 그들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기는 어려웠고 그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이 아쉽기는 했다.

수십일이 지나고, 수백 킬로의 풍경과 사람과 이야기가 지나가고 드디어 산티아고에 도착했다는 감격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일정에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내친김에 순례자들이 몸을 씻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바닷가 마을 피니스테라에 이어 묵시아를 찾았다. 그곳에서 순례자들은 고요했다. 진짜 순례의 끝이 그곳에 있었고 나 역시 바다의 소리를 듣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그곳에서 아야코와 츠요시를 다시 만났다. 혼자 바닷가에 앉아 있던 나를 발견하고 다가온 아야코에게 산티아고 길이 어땠냐고 물었더니 "Body tired, but heart more hard"라고 답했다. 육체와 정신의 고통이 어쩌고 저쩌고 40일 내내 마음속으로 무수한 이야기를 썼다 지웠던 내가 부끄러울 만큼 간결한 대답이었다. 나도 그랬어. 우린 서로 마주 보며 heart가 hard했다는 말을 반복하며 울었다.(산티아고에 도착한 순간부터 나는, 아니 우리는 울보가 되었는데, 산티아고에서 순례자들끼리 만나면 껴안고 울기부터 했다. 이유를 설명하기는 참 어렵지만.) 그리고는 자신은 산티아고에 가면 뭔가 편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고 그래서 내심 실망하고 있었는데 묵시아에 와서 많이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서툰 영어와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일본어를 섞어서 이야기했다. 그러고는 헤어지기 전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로 마지막 기념사진을 찍었다.

카미노를 걸으면서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듯한 순간을 많이 겪었지만 그날 해질 무렵 아야코와 울면서 나눈, 대화라고 할 수도 없는 이 대화가 내 마음속의 무언가를 녹여버린 결코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되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산티아고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을 때 아야코와 츠요시를 다시 만났다. 나는 혹시나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준비해 두었던 달라이 라마의 말씀이 적힌 책갈피를 건넸다. 아야코는 내게 어제 츠요시와 함께 자신들이 마리아를 만났다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내게 아야코는 "네가 우리 마리아야"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말했다. "우리는 카미노에서 성 야고보도 만났고 마리아도 만났어. 그러니까 우리는 충분히 행복해."

아야코와 츠요시는 다른 성지로 이어서 순례를 떠났고 나는 산티아고를 떠났다. 그때 묵시아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을 가끔 들여다본다. 아야코, 네가 나의 마리아가 아니었을까.


조 선생님, 츠요시, 윤 선생님, 나, 아야코


2016년 5월 1일 일요일

나의 산티아고記-6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 아름다운 자연, 몸과 마음을 성찰하는 시간. 이런 것들이 산티아고로 걷는 길이 주는 즐거움이라면, 여기에는 괴로움도 당연히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빈대다.

 2009년엔가 친구와 함께 라오스로 여행을 갔다가 빈대인지 벼룩인지에 물려 여행을 거의 망칠 뻔한 적이 있다. 수도인 비엔티엔에서 묵은 숙소는 외관도 그럴 듯해 보이고, 방도 무척 깨끗해 보였다. 하지만 두 번째 날 우리는 뭔가에 물린 자국을 발견했고, 그 자국은 미친 듯이 가렵기 시작했다. 나는 그 전에 인도 여행을 하며 썼던 150cm 길이의 비닐 장판을(인도 배낭여행을 하며 침대에서 자려면 맨 살이 닿고 싶지 않아진다.) 깔고 잤는데, 그래서인지 장판에서 살짝 벗어났던 어깨 부근이 주로 물려 있었다. 하지만 친구는 그보다 더 심했고, 약을 구하기 위해 약국을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약국 대신 국립병원을 추천해 주었고 물어물어 그곳에 갔다. 공산주의 국가라 국민들에게는 거의 무료라고 들었는데 외국인인 우리는 대상이 아닌지 꽤 비싼 약과 연고를 처방받고 나오기 직전, 의사에게 '우리를 문 것이 뭐냐?'고 물었더니 의사는 동그란 몸통에 털 달린 다리가 여러 개 붙은 벌레를 그려서 보여주었다. 

병원에서 받아온 약과 연고를 열심히 먹고 발랐지만, 가려움의 고통은 한 번에 가시는 것이 아니었고, 우리는 일단 다음 일정대로 방비엥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래프팅, 카야킹의 명소에, 여행자들이 매일 같이 파티를 즐긴다는 그 방비엥에서 마침 우기라 철철 내리는 비와 함께 숙소에 처박혀 몸을 벅벅 긁으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밖에 나갈 때는 덥고 습한 날씨인데도 징그럽게 울퉁불퉁 부어있는 어깨와 팔을 감추려 긴소매 옷을 입고 헐떡이다 보니 지옥이 따로 없다.  tvn에서 했던 '꽃보다 청춘'을 보니 방비엥이 거의 천국처럼 그려졌던데, 우리에게는 끔찍한 기억뿐이라니. 물론 방비엥 탓이 아니라 빈대에 물려 비 오는 방비엥에 오게 된 우리의 운명 탓이었지만. 옷과 짐을 햇볕 아래 말려 소독을 해야 하는데 줄곧 비가 내리니 그저 방안에 에어컨을 켜놓고 속옷만 입은 채 서로의 등에 연고를 발라 댔다. 재미 삼아 서로의 등에 물린 빈대 자국을 세어주었는데, 100개를 넘어 200개에 이르자 급속히 침울해져 버렸다. 

가려움이 너무 극심해서 그 유명하다는 블루 라군에 가기 위해 자전거를 빌려(꽃보다 청춘들이 한 거 다 했다 우리도.) 라이딩에 나섰지만 심지어 페달을 밟다가도 벌레에 물린 복숭아 뼈가 너무 가려워서 "잠깐!!!!"이라고 외치고 자전거에서 내려 긁어야 할 정도였다. 나는 그래도 견딜만했지만 친구는 너무 힘든 나머지 밤에 자다가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쭈그리고 몸을 와들와들 떨 정도였다. 그녀는 그 통증 때문에 진통제까지 먹어야 했다.

그렇게 방비엥에서 지옥 같은 날을 보내다가 괜히 그곳이 싫어져서 루앙 프라방으로 옮겨갔고, 아마도 나을 때가 되어서였겠지만, 루앙 프라방에 간 후부터 가려움이 줄어들면서 완전히 낫고, 날씨마저 활짝 개어 옷과 짐을 다 바짝 말릴 수 있었다. 그것 때문에 루앙 프라방은 무조건 기분 좋은 도시로 기억에 남겨졌다. 물론 그 자체로도 무척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그런 기억 때문에 카미노에 창궐한다는 빈대 이야기는 출발 전부터 나에게는 큰 공포였다. 나보다 한참 전에 카미노를 다녀온 L양에게 물으니 자신은 한 번도 물리지 않았다고 한다. 인터넷 카페에서는 각종 대비법을 알려주고 있었고, 나는 나름의 경험으로 그 비닐 장판과 L양이 알려준 라벤더 오일을 준비했다. 거기에 버물리도 챙겨갔는데,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며.

처음 2주는 괜찮았다. 그러나 어느 날 빈대가 찾아왔다. 손가락에 물린 자국과 가려움. '혹시 모기 아닐까, 모기겠지'라고 스스로를 속이고 싶었지만 나날이 물린 곳이 바뀌며 늘어갔다. 어지간하면 손빨래를 하고, 세탁기를 쓰지 않던 내가 그때부터 3-4유로씩이나 하는 세탁기에 건조기까지 쓰기 시작했다. 마침 함께 걷던 K양도 나처럼 빈대의 습격을 받았고.

추석을 맞았던 어느 마을에서는 새벽에 이상한 기분에 침대를 살펴보니 빈대가 기어가고 있었는데 차마 죽이지 못해 슬쩍 아래로 떨어뜨리고는(살생을 피하려는 거였지만, 나중에 다른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니 '아니 다른 사람은 물리라는 말이냐'고 욕도 먹고... ㅡㅡ;;;)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했고, 어딘가에서는 일찍 잠자리에 들려고 침낭에 들어갔는데 가슴팍이 가려워 살펴보니 빈대가 있었던 적도 있다. 빈대가 침낭 안에서 발견되었다는 건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사건 이었는데, 그 시간에 세탁기를 돌릴 수도, 침낭 없이 잠을 이룰 수도 없었으니 그 밤은 정말 끔찍했다. 추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침낭에 들어가긴 했지만 지옥불에 몸을 던진 기분이랄까, 인당수에 던져진 심청이 같달까. 온전히 나를 침낭 안의 그들에게 제물로 바친 것이다. ㅜㅜ

덕분에 다음 날 도착한 도시에서 침낭과 입고 있던 옷까지 대부분을 버리고 새로 장만하는 결단을 해야 했다. 그리고 또 반복되는 세탁과 건조.

사실 이때 함께 걸었던 K양이 없었다면 나의 카미노는 빈대와의 우울한 기억으로 점철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와 비슷하게 빈대에 시달리던 K양과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며 위로를 받기도 하고, 빈대를 박멸하자며 한 번씩 욕조가 있는 사설 호텔에 들러 가진 옷과 짐들을 싹 세탁하고 빈대 퇴치제로 목욕을 하다시피 하다 보니 조금씩 그 상황을 웃으며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싹 퇴치를 했다고 생각하면 3-4일 후 다시 물린 자국이 나타나고 심지어 어느 날은 머리가 느낌이 이상해 만져보니 그곳에도 빈대에 물려 부어 있기도 했다. ㅡㅡ(빈대가 얌전히 뽈뽈뽈 내 머리카락을 제치고 두피에 접근해 살포시 무는 장면을 상상하니 끔찍했다.)

카미노 길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인터넷에는 살기가 싫어질 정도라고 표현하던데....) 괴롭기도 했고, 어느 날은 발바닥을 물려서 걸을 때마다 아프기도 했고, 머리 속의 물린 자국은 가렵다기보다 어이가 없기도 했는데, 또 한 번 호텔에 들었던 어느 날 새벽 다시 뭔가 물린 자국을 발견하고 이렇게 결심했다. '그래, 또 물렸구나. 물라면 물라지. 빈대가 내 인생을, 내 즐거움을 망치게 두지 않겠어'라고. 카미노에 오기 전부터 '빈대만은 참을 수 없다고, 만약 빈대에 물리면 카미노를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거'라고 다짐했다던 K양은 산티아고를 거의 일주일 남짓 남기고는 아예 알베르게에서 묵기를 포기하고 호텔만 이용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빈대가 우리를 물거나 말거나, 그냥 알베르게에 자자, 그냥 우리는 즐겁게 길을 가자"고 말했다.

대략 그 무렵을 정점으로 해서 빈대의 고통에서 점차 벗어났던 것 같다. 산티아고에 도착해서도 하루 이틀 정도 의심스러운 자국이 발견되어 긴장을 풀 수는 없었지만 어느 새 그 기억조차도 점차 사라졌다.

한국에서 L양을 만나 반쯤은 따지듯이 빈대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더니 그녀는 이해할 수 없어했다. 그때 새삼 이해하게 된 것은 사람은 각자 자신의 경험이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본다는 것이다. 누구나 산티아고 가는 길은 그 개인의 경험 안에서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비옷이 필요치 않았다던 L양과 다르게 나의 카미노는 첫날부터 폭우와 함께 시작해 잦은 비와의 만남이었고, 우산 하나 들고 가면 된다던 인터넷 카페의 조언에 따라 접는 우산을 가져갔지만 폭우 앞에서는 무용지물에 거추장스럽기만 해서 첫날 숙소인 론세스바예스에 살짜기 놓고 왔다. 그러니까 어느 가이드북에 2인실을 쓸 수 있다고 해서 찾아갔던 알베르게의 소위 2인실이 관을 두 개 합쳐놓은 것만큼 울적하고, 지저분해 보였다고 해도 그 책의 저자를 탓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겪은 대로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남에게 전달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심지어 스키 장갑을 가져가라는 조언을 받았다는 분도 만났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나의 빈대 체험 역시 카미노 데 산티아고에서는 극히 사적인, 일부의 경험일 뿐일 것이다. 우리가 두 번 살 수 있다면, 같은 순간에 다른 선택을 여러 번 할 수 있다면 몰라도, 우리는 각자 자신의 시간 만을 산다. 이 사실은 어느 숙소가 좋았다거나, 어느 지역이 아름다웠다거나 하는 우리가 주고받았던 모든 경험과 정보에 해당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내가 가보지 않은 이상 알 수 없고, 내가 그곳을 선택하면 다른 곳은 나의 경험에서 배제되는 일들의 반복. 그것이 한정된 시간과 공간을 사는 우리의 숙명이다.

이 빈대 체험이 대단한 교훈을 주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내가 빈대와 싸우며 뭔가를 배워나갈 때, 누군가는 다른 것들을 경험하며 배웠을 테니. 그런 점에서 한정된 시간과 공간은 평등하기도 하다. 그래도 그 시간 동안 무수히 행복하려고, 행복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나 자신은 칭찮해 주고 싶다. 아님 말고. 가끔 카미노를 다시 걷고 싶을 때가 있지만, 빈대를 생각하면 아직 용기가 안 난다.

사족 1. 빈대에 시달리다가 거의 패닉 상태로 침낭과 옷을 버리고 새로 구입하느라 여행 예산을 초과했다. 비난하고 싶진 않지만 빈대, 네 탓이다. ㅡㅡ^

사족 2. 이른 아침 길을 걸을 때면 생각나는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는데, 빈대를 생각하며 부른 노래 "내 속에서 살고 있는 널 죽일 거야~~~~ 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