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27일 수요일

다람살라에서 160127


겨울이 한창인 다람살라는 다른 계절에 비해 여행자도 뜸하고, 추위를 피해 남인도나 델리, 혹은 보드가야로 떠난 티베트인들도 많아 한적하기 그지없다. 택시와 오토바이가 뒤엉키던 돌마촉 갈림길이나 마을의 중심이라고 할만한 메인 스퀘어도 사람이 많지 않다.

사실 성수기의 다람살라, 정확히 맥그로드 간지는 좁은 길을 가득채운 버스, 택시, 오토바이 그리고 사람과 동물 덕분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여행자들이 너무 많아 물이 부족할 때도 있고, 들뜬 여행자들과 동네 사람들이 술을 먹고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하루키의 책에 나오는 그리스의 어느 관광지로 유명한 섬 사람들이 '(성수기인) 여름은 사람이 사는 게 아니에요'라고 푸념했다는 이야기가 다람살라에도 그대로 적용될 법한데, 차이가 있다면 다람살라는 겨울과 우기 몇 달을 빼고 일년 내내 성수기라는 것이다.

몇 년 전만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인도 TV에 다람살라가 인도의 알프스쯤으로 소개된 이후부터 여유가 좀 있는 인도인들은 다람살라로 휴가를 오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외국인 여행자에 더해 인도인 여행자들까지 다람살라를 찾아 오는 바람에 거의 일년 내내 북새통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일년에 얼마 안되는 한적한 비성수기의 다람살라가 나같은 거주민들에게는 무척 소중한 시간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춥기는 하지만 그래도 올해는 작년보다 추위도 덜해서 3000미터 가까운 산등성이인 트리운드까지만 눈이 내렸다. 그나마도 며칠 안 가 녹아버렸다.

네 달 만에 집에 돌아와와 보니 이곳에도 이런 저런 변화가 있다. 벨기에 아저씨가 운영하던 우리 집 앞 카페 일리떼라띠는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고, 인도에서 제일 맛있는 파란타를 파는 이름없는 짜이집 아저씨는 멋내고 여기저기 다니시느라 정작 파란타는 청소년이 된 아들과 딸이 번갈아 만든다.

세입자들에게 방세를 받는 족족 술값으로 탕진하는 통에 가족들의 근심을 불러 일으켰던 우리 집 주인 아저씨는 작년 초에 비지니스를 한다며 한시간쯤 떨어진 노블링카 근처로 혼자 옮겨갔다. 갑자기 사라진 아저씨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 아니냐며 걱정했던 우리의 우려가 무색하게 몇 달 후 아저씨는 몸이 아파 병원에 다니러 왔다며 나타났다. 혼자 살면서 눈치 안보고 맘껏 술을 마셔서 병이 났다고 한다. 네 달만에 돌아와 보니 아저씨는 다시 노블링카로 돌아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우리집 옆에 타이완 아주머니가 짓고 있는 4층짜리 건물은 아직도 완성이 되지 않았고, 맥간 올라가는 길목에는 5층짜리 초고층(!) 건물이 지어지고 있다. 그보다 먼저 새로 문을 연 호텔은 창에는 통유리를 끼우고 건물 외관은 흰색과 빨간 색의 타일로 마감을 하고는 우뚝 서 있다.

동네 소식을 알고 동네 사람들과 안부 묻는다 것이 철든 이후로 가져보지 못한 경험이다. 어제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온 심런이 지난 몇 달 동안 어디 가 있었냐고 한다. "한국에 가서 가족들과 친구들을 만나고 왔어."하고는 "Did you miss me?"라고 물었다. 수줍게 웃으며 "Yes, of course."라고 한다.

나도 물론, 여기가 그리웠고 돌아와서 기뻤다. 이런 저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내가 돌아올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이 고맙다.

2016년 1월 26일 화요일

나의 산티아고記-3

세 개의 시기, 혹은 고통


내가 5년 넘게 살고 있는 인도 다람살라는 해발 1780미터의 산자락에 위치해 있다. 평지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가장 잘 알려진 맥그로드 간지 역시 산비탈에 뻗어있는 좁은 길을 따라 집들과 상점들이 늘어선 곳이다. 이곳에서 운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마을에 몇 군데 있는 요가 클래스에 등록하거나, 위아래 마을을 잇는 길을 따라 산책을 하는 정도뿐이다. 요즘 들어 운동복 차림으로 내리막길을 뛰어다니는 서양인을 몇 번 보기는 했는데, 그럴 때면 '저러다 무릎 나가지.'라는 생각을 한다.
까미노 데 산티아고, 산티아고까지의 800km 가까운 길을 걷기로 정한 후 내가 할 수 있는 준비는 여행 비용 마련과 인터넷을 통한 정보 수집 정도였을 뿐, 남들이 한다는 몸 만들기는 불가능한 여건이었다. 매일 걸어 오르내리는 출근길의 운동효과를 조금이나마 높여 보려 가방 안에 읽지도 않을 책을 잔뜩 넣어 다니거나, 집에서 틈틈이 요가와 스트레칭을 하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러면서도 아마 내심 하루 25km 내외를 걷는다는 산티아고 길을 걷는 것에 대해 자신감이 있었던 모양이다. 빈대 걱정도 하고, 챙겨갈 물건에 빠진 것은 없는지 챙기면서도 그 길을 걸을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의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 걷기 시작한 후 1-2주가량 나를 사로잡은 육체적 고통에 대해 생각보다 더 많이 놀랐고, 거기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첫날 27km를 걸은 이후 매일매일 25km 내외를 '걸어야 하는' 시간들은 고통스러웠다. 통증은 발가락, 발목, 무릎, 허벅지, 종아리를 가리지 않고 옮겨 다녔고, 어깨와 허리는 익숙하지 않은 무거운 배낭에 짓눌려 피부색이 변할 정도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통증들은 '걷지 않는' 시간에도, 잠을 잘 때도 떠나지 않았다. 다행히 며칠 만에 가라앉았지만 발가락에 생긴 물집도 괴로움을 더해주었다. 그러나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내가 이 고통 때문에 이 길을 포기할 지도 모르겠다는, 이 고통에 굴복할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었다.
남들보다 뛰어난 지구력도 정신력도 없는 나지만 그래도 해야 할 무언가로부터 도망친 일은 별로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진심으로 그때의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그래서 1주에서 2주로 넘어가는 며칠 동안은 밤마다 자리에 누워 '그래 이 정도 했으면 됐어. 꼭 다 걸어야 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자. 남은 시간은 마드리드랑 바르셀로나도 보고 관광도 하는 거야. 좋아. 응?' 이런 망상에 빠져 흐뭇하게 기절하듯 잠에 빠지기도 했다.
아쉽게도 다음 날 새벽이 되면 그런 생각은 까맣게 잊고 부지런히 짐을 싸서는 다른 순례자들과 뒤섞여 길을 나서고 말았지만. 아침에 일어나 씻고 짐을 싸는 그 과정이 관성이 되는 데는 1주일이면 충분했다. 체력은 기대에 못 미쳤지만 다행히 나는 어디 가서든 적응을 잘 하는 인간이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다른 순례자들에게 "힘들지 않아? 아픈 데는 없어?"라고 물었던 것은 그들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나만 이렇게 힘든 것인지, 그들도 나만큼 고통스러운지 궁금했기 때문임을 고백한다.


지리산 종주도 하고, 히말라야 트레킹도 했던 나니까 산티아고 길 정도야 거뜬히 걸을 수 있을 거라고 내심 생각했던 거다. 그런데 이렇게 힘들다니 이젠 늙은 것일까, 미리 몸을 만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일까. 다행히 내가 물었던 순례자들 역시 정말 힘들다고 이렇게 아프다고 경쟁하듯 대답해 주곤 했다. 그들이 고통을 고백할 때마다 내 마음은 평화를 얻었다. 감사.
그러나 익숙지 않은 고통을 견디고 받아들이는 과정은 단지 몸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또 다른 고통, 보다 근본적이고 깊은, 심지어 까미노를 마친 후에도 떠나지 않을 고통이 거기에 있었다. 육체의 고통이 줄어들고 몸이 적응을 마치자 나는 마음과 영혼의 고통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과정이야말로 까미노에서 겪게 되는 가장 큰 도전이었다. 육체의 고통이 줄어들수록 아니 그 고통을 통과했기 때문이라는 듯 내 마음속의 고통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나타났다.


길을 걷는 동안 우리는 자신의 몸을 그리고 마음을 똑바로 바라보고 대면하는 일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거기에는 육체의 고통뿐만 아니라 마음의 고통까지, 내가 그것을 알고 있었든 모르고 있었든 간에 그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고, 혼자 걷는 길 위에서 그것을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 사실 때문에 내게 까미노가 더 값진 것이었다고 인정하게 해 주었다.

독일에서 온 한 아저씨가 친구에게 들었다며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까미노를 걷다 보면 세 개의 시기를 거치게 되는데 첫 번째가 육체적 시기(Physical period), 두 번째가 감정적 시기(Emotional period), 그리고 세 번째가 영적 시기(Spiritual period)이다. 그런데 세 번째는 까미노가 끝난 다음에 올 수도 있다."

까미노에서 마주하게 되는 세 개의 고통, 아니 세 개의 시기 중 나 역시 세 번째 시기를 아직 마치지는 못한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나의 까미노는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소떼를 무서워하는 나를 구해준 오스트리아 아저씨 스테판의 말대로, 우리는 아직 '인생이라는 까미노'를 걷고 있으므로, 걸어야 하므로. 

2016년 1월 1일 금요일

나의 산티아고記-2

올라

띄엄띄엄이나마 카미노를 걷기 전 스페인어 단어를 외워두었지만, 문장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몇 개 되지 않았다. 그래도 중요한 말은 기억하고 있었다. 올라(안녕), 꼬메르(먹다), 베베르(마시다). 영어를 전혀 못하는 빈첸토 아저씨와는 이 세 단어를 사이에 두고 친구가 되었다.

산티아고를 향해 프랑스 생장에서 출발한 뒤 도착한 두번 째 마을 수비리. 전날의 폭우는 그치고 날은 맑았다. 샤워를 마치고 젖은 신발과 빨래를 널고 숙소 계단에 앉아 햇빛을 쬐고 있을 때 중년의 스페인 아저씨가 말을 건넸다. "올라" "올라" 대화라고 할 수도 없는 몇 마디 말이 오고 갔다. 상형문자라도 해독하듯 많은 말들 속에서 몇 개의 단어들이 떠올랐는데, 만약 이 대화를 만화 속의 말풍선처럼 가상으로 재구성하면 이런 식일 것이다.

"안녕"
"안녕"
"넌 어디서 왔니?"
"한국에서 왔어. 너는?"
"나는 스페인 사람이야."
이 대목에서 나는 먹고 있던 젤리를 건넸다.
"고마워. 이름이 뭐니?"
"내 이름은 영이야. 너는?"
"내 이름은 빈첸토. 밥은 먹었니?"
"아니 아직 안 먹었는데."
"그럼 이따가 같이 밥 먹자."
"좋아."
"좋아, 내가 데릴러 올게."

이렇게 말했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실제로 우리 입에서 나온 단어는 열 개도 채 안된다. 어쨌든 그런 의미가 교환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대화에서 언어의 역할은 매우 작았고, 우리의 소통은 나름 완벽했다.

갑자기 27km남짓을 걸어 피레네 산맥을 넘어온 피로가 극심했다. 이틀째를 맞은 몸은 여기저기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실은 비명은 물론 내 입에서 나왔다. 걸을 때마다 아팠기 때문에.) 해야할 일을 모두 마치고 나니 잠이 쏟아졌다. 밥을 먹자던 빈첸토는 보이지 않았고, 그런 약속이야 시골 어르신들이 "다음 장에 보세"하고 헤어지는 것과 비슷한 거라는 생각으로 거의 잊고 있었다. 이층침대의 일층인 내 자리는 높이가 낮아 앉아 있기가 불편해서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러니까 당연히 내가 해야할 일은 수면이 아니겠는가. 제대로 소통이 되었는지도 의심스럽던 스페인 아저씨는 깨끗이 잊고 단잠에 빠져있을 때 누군가 나를 깨웠다. 빈첸토, 그리고 한 무리의 스페인 사람들.

오후 4시가 다 되어서야 밥을 먹으러 가자며 자신도 처음 만난 다른 스페인 친구들까지 대동하고 나를 데리러 온 것이었다. 식당에 자리를 잡고, 대화가 시작되자 나는 그들이, 아니 그들도 거의 영어를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혼 기념일을 맞아 휴가로 카미노를 걷기로 한 스페인 커플, 그리고 40 전후의 두 명의 남자. 모두들 처음 만난 사이였다. 카미노를 한달 이상 걷는 외국인 순례자들과 달리 스페인인들은 휴가때마다 1-2주씩 걸어서 마치는 경우가 많았다. 빈첸토 아저씨와 나머지 친구들도 대체로 2주 정도의 예정으로 카미노를 온 것이었다. 듣던 대로 흥겹고 소란스럽게 식사를 마친 그들은 내 몫까지 당연스레 계산을 했고 그날 이후 보름 정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빈첸토 아저씨와 그의 친구들, 그리고 또 다른 친구들을 만났다.

영어를 못하는 빈첸토 아저씨는 언제나 먹을 것, 마실 것을 권하고 아낌없이 베풀어 주었다. 그럴 때마다 일단은 사양하는 내게 그는 스페인어로 말하곤 했다. "꼬메(먹어)" "베베(마셔)" 아, 먹으라는 말인가. 마시라는 말인가보다. 그렇게 알아듣고 그의 짧은 스페인어에 왠지 마음이 순순해져서 권하는 대로 받아먹고 마시곤 했다.

틈만 나면 먹고 마시면서 정작 배낭은 손바닥만하고, 몸에 쫙 붙는 스판 바지를 입고 여자만 보면 미소가 떠나지 않는(나한테만 친절한 것은 아니었으니, 그는 스페인 남자~) 빈첸토 아저씨. 12킬로가 넘는 배낭을 메고 헐떡이는 나를 매번 놀리기에 그러는 아저씨 배낭에 대체 뭐가 들었느냐, 필요한 물건은 어떻게 하느냐고 손짓 발짓을 동원해 물었을 때 그가 씩 웃으며 품에서 꺼낸 것은, 마스터 카드.

빈첸토 아저씨와는 카미노에서의 많은 인연이 그렇듯이 길 위에서 또 만나겠거니 생각하다가 결국 못 만나고 헤어지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을까 싶어 사진을 찍어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연락처도 없으니 영영 만나긴 어렵게 됐다. 인도로 놀러와서 나를 찾겠다고 큰 소리는 치셨는데... 아저씨 덕분에 내게 스페인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떠들기 좋아하는, 그러니까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알려진 그대로인 것으로 각인되었다. 스페인 사람 한번 제대로 만난 셈이다. 하나 더, 그들의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친절함도 기억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