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22일 수요일

고독한 책읽기-5 불멸의 산책 / 장 크리스토프 뤼팽

내 마음 같지 않은 산티아고 순례

나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하지만 사실 나는 조금 시니컬한 유머가 담긴 글을 좋아한다. 그런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은 가득하지만 나는 그런 시니컬함을 유지하기에는 지나치게 감정적인 성격이며, 유머 감각도 부족한 듯하다. 꿈과 현실의 차이는 항상 그 거리만큼 자아의 만족감을 반감시킨다.

아무튼 그런 내가 읽기 시작하자마자 정신없이 빠져들어 읽었던 책이 바로 '불멸의 산책'이다. 프랑스 외교관 출신의 작가인 장 크리스토프 뤼팽이 산티아고 북쪽 길을 걸었던 경험을 한참 후에 기억에 의지해 적어 내려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산티아고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는 여행기를 본 적이 없다. 

"카미노는 영혼을 찾아가는 시간의 연금술이다.
그것은 즉각적일 수도 신속할 수도 없는 긴 과정이다. 몇 주 동안 계속 그 길을 걷는 순례자는 그것을 경험하게 된다. 일주일 걷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과 비교할 때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는 데서 느끼는 다소 유치한 자부심은 차치하더라도, 그는 잠깐 걷는 것만으로는 습관에서 벗어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더 겸손하고 심원한 진실을 깨닫게 된다. 잠깐 걷는 것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지 못한다. 돌멩이는 가공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돌멩이를 다듬으려면 더 오랜 노력, 더 많은 추위와 더 많은 진흙 길, 더 많은 배고픔과 더 적은 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왜 많은 사람들이 신앙심 때문만이 아니라, 스포츠나 영적 이유 따위를 핑계 삼아 여전히 산티아고 길을 걷는지 알 수 있다. 사실 걷는 것 자체가 주는 이런 의미는 이 길을 걷기 전에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나는 오랫동안 걷기에 매료되어 있었지만 왜 걷는 일이 사람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키는지, 그리고 내가 왜 그 경험을 필요로 하는지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웠다. 영국에 살고 있던 동생을 먼저 방문해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겠다는 계획을 말하자 동생은 큰 선심을 쓰듯이 말했다. "누나, 내가 차로 데려다줄게. 2박 3일이면 갈 수 있어. 얼른 다녀와서 우리 가족들이랑 다른 데로 놀러나 다니자." 아, 아무리 설명해도 동생과 올케는 대체 왜 차로 이틀이면 충분한 그 길을 한 달이나 걸려서 걸어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했다. 그 순간에 '불멸의 산책'을 쥐어줄 수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그러나 이렇게 산티아고 길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해도 그것이 중세의 순례길이 가졌던 신앙심과 성스러움을 담고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에서와 같은 신비한 영적 체험을 기대한다면 당신은 실망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뤼팽은 그 사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다시 활기를 찾았다 해도, 이제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신앙심을 다지기 위해 그 길을 걷는 것은 아니다. 카미노는 거대한 포스트모던 시장에서 소비를 위해 제공되는 상품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산티아고 길이 아직 순례길로 여겨지고는 있지만, 실상은 신앙과 영적인 이유가 아니라도 마음 편히 적은 예산으로 비교적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여행지가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곳을 찾는 순례자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산티아고 길 순례를 소재로 한 영화 'The Way'에서 주인공 마틴 쉰은 산티아고 순례를 떠났다가 조난당해 사망한 아들을 대신해 순례를 시작하지만, 그가 길에서 만나는 이들은 살을 빼러 온 네덜란드인, 소위 'writer's block'을 극복하러 온 아일랜드 작가, 폭력 남편에게 시달리던 미국인 이혼녀 등이다. 그들 중 누구도 신앙심이 동기가 되었으리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정작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보여주는 감동은 신앙심 이상의 무엇이 그 길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카미노는 나에게 자신의 진실을 슬며시 알려주었고, 그것은 곧바로 나의 진실이 되었다. 그 깨달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기독교 순례지가 아닌 훨씬 더 큰 것이 될 수도 있고 훨씬 더 작은 것이 될 수도 있다. 그 장소는 고유한 것으로서, 어떤 종교에도 속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거기에 각자가 바라는 모든 것을 갖다 붙일 수 있다. 만일 그곳이 특정 종교와 가까워야 한다면, 그것은 종교들 중에서도 가장 덜 종교적인 종교, 신에 대해서는 아무 말하지 않고 단지 인간이 자기 존재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허용하는 종교여야 한다. 그렇다면 산티아고는 불교의 순례지다. 산티아고 길은 생각과 욕망에서 오는 고통을 덜어주고, 모든 허영심과 육체적 고통을 마음에서 지워주며, 사물을 둘러싸 그것을 우리의 의식과 분리시키는 완강한 껍질을 제거한다. 그리하여 자아가 자연과 공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종종 나 자신은 불교도라는 소개를 하게 되었는데, 아무도 '불교도인 네가 왜 여기에 왔느냐고 묻지 않았다. 심지어 독일에서 온 이슬람교도인 청년 둘을 만난 적도 있다. 나도 역시 '이슬람교도인 네가 왜 왔느냐'고 묻지 않았다. 다만 어떻게 오게 되었느냐고 묻자 친구 사이인 둘 중 한 명이 우연히 산티아고 길을 알게 됐고 다른 친구에게 권유해서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산티아고 길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와 상관없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어떤 것이 존재했고, 그 때문에 그 길을 걷기 전에도, 그리고 후에도 우리는 그것이 비록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그 힘을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카미노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것이 정말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줄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생생하게 살아 있고, 지금 내가 그랬던 것처럼 여행 전체를 들려주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다. 물론 그렇게 해도 핵심은 빠져 있다. 나도 알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도 머지않아 다시 그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아마 당신도 그렇지 않을까."

뤼팽이 책에 쓴 이 마지막 구절은 그의 책에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이 책에 대해 감상을 쓴다는 것이 내게는 역부족인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내가 산티아고를 걷기 전에도 그랬지만 다녀온 후에는 더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다만 그와 조금이나마 동일한 경험을 했다는 사실이, 그래서 이 책을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 다행스럽다. 나도 다시 그 걷게 될 것이다. 당신은 이 책을 읽게 되기를 바란다. 물론 그리고 그 길을 걷게 된다면 완벽할 것이다.


2016년 6월 20일 월요일

고독한 책읽기-4 나무 수업 / 페터 볼레벤



일본의 궁목수인 니시오카 츠네카츠가 쓴 '나무의 마음, 나무의 생명'에는 천 년 이상 된 나무를 구하러 대만의 숲을 방문했던 경험이 소개되어 있다. 숲에 들어서서 마주한 나무들의 모습이 신령으로 느껴져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엎드려 절을 했다고 한다. 천 년이 넘는 세월을 한 자리에서 살아온 생명에 대한 경외감, 그것이 어쩐지 알 것만 같아 마음속 깊이 새겨두었다. 

니시오카 츠네카츠가 나무에 대한 한없는 경외감에도 불구하고 나무를 베고, 이용해야 하는 사람이었다면 페터 볼레벤은 그 나무를 살피고, 돕는 사람이다. 두 사람 모두 전문적인 글쟁이가 아니고, 자신의 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인데, 그런 그들의 글은 투박하기는 하지만 숙성된 경험에서 우러나온 향기가 그득하다. 

페터 볼레벤은 20년 넘게 숲을 친환경적으로 관리하면서 나무들의 삶을 이해하게 되었다. 혼자 자랄 때가 아니라 서로 함께 자랄 때 더 건강한 나무들은 뿌리와 뿌리를 맞대어 동료를 돕는다. 햇빛이 잘 들게 되었다고 해서 서둘러 위로만 자랐다가는 겨울이나 벌레의 습격 같은 위기에 대처할 영양분을 비축하지 못해 오히려 죽음을 맞을 수 있다. 그래서 어린 아기  나무들은 엄마 나무 밑에서 부족한 빛과 물을 가지고도 견디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넓은 평지에 혼자 자라는 나무보다 숲에서 다른 나무들과 경쟁하며 자라는 나무가 훨씬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나무들은 각자의 성격대로 환경에 반응한다. 같은 조건에서도 언제 낙엽을 떨구고 언제 꽃을 피울지 나무들마다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다. 

나무는 자신들의 생존만이 아니라 수많은 균류, 벌레, 조류나 초식 동물의 삶의 터전이다. 더 나아가서 숲이 있는 곳은 바닷가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까지도 수분이 전달되어 비가 내리고 생명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 오래된 숲일수록 이런 생명의 보금자리 역할을 건강하게 수행해 낼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다 보면 극단적인 나무 보호론이나 환경 예찬론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할 수도 있다. 
"나무가 생명체란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또 모두가 별생각 없이 나무를 물건처럼 취급한다. 난로에서 신나게 타닥타닥 타는 장작은 알고 보면 불길에 사로잡힌 너도밤나무나 가문비나무의 시신이다.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이 책의 종이 역시 종이로 만들려고 쓰러뜨려(그래서 생명을 빼앗아) 잘게 조각낸 가문비나무와 자작나무다. 너무 지나친 말이라고?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는 식물도 생명이 있고, 고통을 느끼니 채소도 먹어서는 안된다는 식의 주장을 펼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결국엔 자연의 일부고 신체 구조상 다른 종의 유기물을 이용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 이런 필연성은 모든 동물과 우리가 공유하는 공통점이다...... 나무에게도 나무에게 맞는 삶을 허용한다면 동물을 이용하듯 나무를 이용하는 것 역시 별문제가 안 될 것이다. 나무에게 맞는 삶이란, 나무가 사회적 욕구를 실현할 수 있고, 완벽한 흙을 갖춘 진짜 숲에서 성장할 수 있으며, 쌓은 지식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다는 뜻이다. 적어도 일부나마 존엄하게 늙어 갈 수 있고 마침내 자연사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삶이야 말로 나무 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에게 주어져야 할 것들이 아닐까.

2016년 6월 19일 일요일

나의 산티아고記-9


산티아고로 가는 길, 엘 카미노 데 산티아고

그 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나무위키의 '엘 카미노 데 산티아고'항목은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스페인의 유명한 성지순례길. 순례길의 상징은 가리비와 노란 화살표.
유럽의 여러 가지의 루트로 출발해서 최종 목적지인 스페인의 갈리시아 주에 위치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는 도보순례이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사도 성 대(大) 야고보가 예루살렘에 순교한 직후, 그의 제자들이 야고보의 시신을 몰래 수습해 돌을 깎아 만든 배(石船)를 타고 이베리아 반도의 갈리시아 지방에 도착했으나 거기에서도 로마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고난을 받던 중, 이 지역을 다스리던 토착민들의 지배자인 루파의 시험을 통과해 갈리시아 지방에 무사히 정착할 수 있게 되었고 거기서 제자들은 야고보의 유해를 제대로 매장하고 갖가지 이적을 행해 로마인들과 토착민들을 개종하는데 힘을 쏟았다.
세월이 흘러 8세기경, 지나가던 주민들이 밤길을 걷다가 밤하늘을 비추어야 할 별빛들이 구릉지의 들판을 맴돌면서 춤을 추는 것을 목격하였고 그곳을 조사하다 야고보의 무덤을 발견하면서 이 지역을 '빛나는 별 들판의 산티아고(Santiago de Compostela)'라 부르면서 성지로 추앙받게 되었다."



산티아고는 성(聖) 야고보의 스페인식 발음이다. 카미노는 길이라는 뜻이니 '엘 카미노 데 산티아고'는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라는 스페인어이다. 순례자들은 흔히 카미노라고 칭한다. 2015년 9월 10일,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의 작은 마을 생 장 피 드 포르(St Jean Pied de Port)에서 출발한 후로 나는 얼굴도 뵙지 못한 이 야고보 성인의 이름을 수도 없이 입에 올리게 되었고, 성당에서, 마을의 동상에서, 가게마다 놓인 엽서와 기념품에서 그의 흔적을 만날 수 있었다. 나무위키의 설명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정작 야고보 성인은 그 길을 걸은 적이 없지만. 

이 길이 생긴 것은 성지로 추앙받게 된 산티아고로 향하는 순례자들이 전 유럽 각지에서 모여들면서부터다. 순례자들은 스스로를 나타내는 표식으로 조개껍데기를 달고(야고보 성인의 시신을 태운 배에 조개가 붙어 있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지팡이를 짚으며 이 길을 걸었고, 순례자들을 돕기 위해 숙식을 제공하는 알베르게가 생겨났다. 이 순례는 중세 유럽 교회에 의해 장려되었다고 하는데, 이슬람의 침략으로 스페인이 점령당하는 등 성지를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의 반작용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당시의 순례자들은 지금의 후예들이 마주하는 실존적인 번뇌와 달리 생생한 생명의 위협과 맞서 신앙의 힘으로 그 길을 지나야 했다. 이때의 위험은 단지 이교도만이 아니라 야생동물, 강도, 질병, 추위와 굶주림 등등 더 다양하고 실제적인 위협이었다. 

중세의 열정적 신앙의 시대가 지나고, 스페인이 이베리아 반도를 이슬람으로부터 되찾은 후로는 오히려 관심이 줄어들어, 소수의 열성적인 가톨릭 신자들만이 기억하는 길이 되었다. 억압과 위협의 반작용이 어떤 열정이 될 수 있다는, 혹은 열광적인 신앙이야말로 시련과 탄압의 결과일 수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일반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한참이 지난 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산티아고를 방문하고,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다시 순례자들의 발길이 늘어났다. 보다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브라질 작가 파울로 코엘료가 이 길을 순례한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쓴 '순례자'라는 소설이 1987년 출간되고 꾸준히 읽히면서부터다.  

나 역시 산티아고 길을 알게 된 것은 '순례자'를 통해서였는데, 유럽이나 아메리카 대륙에서 온 중년 이상의 순례자들의 경우 그 책을 읽고 순례를 결심했다는 이들이 간혹 있었다. 언젠가 쓸 일이 있겠지만 나는 꽤나 오래전부터 걷는 일 자체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순례라는 이 길의 깊은 의미를 따질 것도 없이 오래도록 걸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을 빼앗겼다. 그 후론 산티아고에 관련된 책을 읽고 그 길을 걷는 나를 종종 상상했다. 그러나 정작 그 길에서 가장 많이 듣게 될 질문 '왜 여기에 왔는가?'에 대한 답은 미리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언제, 어떻게 갈 것인가만을 생각했을 뿐이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에는 일 년 내내 순례자들이 끊이지 않는다. 순례자는 스페인어로 남성은 페레그리노(Peregrino), 여성은 페레그리나(Peregrina)라고 불리는데(순례남, 순례녀?), 유럽 곳곳에 있는 출발지점의 산티아고 순례협회에서 일종의 여권에 해당하는 크레덴시알을 발급받아 순례자로 다시 태어난다. 이 크레덴시알이 있어야 순례자 전용 숙소인 알베르게에 머물 수 있고, 최종적으로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순례 증명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크레덴시알은 진짜 여권이나 지갑만큼이나 순례자들에게 소중한 물건인데, 나는 순례 첫날 폭우에 젖은 후 크레덴시알이 혹시나 찢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그 무엇보다 조심스럽게 간수했다. 물론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큰 일이기 때문에, 전날 머문 숙소에 크레덴시알을 두고 왔다며 되돌아가는 순례자를 만나는 일도 드물지 않다. 




현대의 순례자들은 크레덴시알을 발급받을 수 있는 주요 지점에서 출발하고, 순례길도 크게 네 개 정도로 되어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이 피레네 산맥을 사이에 두고 스페인과 이웃하고 있는 프랑스의 작은 마을 생 장 피 드 포르에서 출발하는 프랑스 길이다. 스페인 북쪽 해안을 주로 따라 걷다가 갈리시아 지방에서 프랑스 길과 만나는 북쪽 길이 있고, 포르투갈에서 출발하는 포르투갈 길, 스페인 남서부에서 출발하는 은의 길이 주로 순례자들이 걷는 길이다.

하지만 중세의 순례자들은 사실 자신의 집에서부터 순례를 시작했다고 하고, 따라서 실제로는 유럽 전역에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 놓여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잘 알려진 네 개의 길 외에도 순례자 길을 표시하는 조개와 노란 화살표가 그려진 비석이 세워진 길들이 꽤 있다고 한다. 내가 순례를 마치고 친구가 사는 독일의 작은 마을 바드 키싱언에 갔을 때도 숲 속에서 그런 비석을 볼 수 있었다.

작년에 우연히 읽었던 '불멸의 산책'이라는 책은 외교관 출신의 프랑스 작가 장 크리스토프 뤼팽이 북쪽 길을 걷고 나서 쓴 책이다. 바닷가를 따라 걷는 그 길의 아름다움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어 프랑스 길을 걸으려던 계획을 바꿀까 하는 마음이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언젠가 다시 그 길을 걸으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일단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는 프랑스길을 걷기로 결정했다. 

어느 길을 통해 걸었든 목적지는 같다. 바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의 목적지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왠지 소박하고, 성스러운 분위기를 기대하지만 이 곳은 공항이 있을 정도로 큰 도시다. 그동안 걸어왔던 숲과 언덕이 아닌 큰 도로와 높은 건물 사이를 지나는 쑥스러움은 그동안 거쳐온 몇몇 대도시에서 이미 겪었던 바다. 차이가 있다면 산티아고 근교에 접근하면서부터 눈에 띄게 따뜻해진 순례자들을 맞는 사람들의 태도다. 순례길에서 만날 수 있는 스페인 사람들 대부분 친절하지만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지나가던 차는 경적을 울려주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부엔 카미노'라고 인사를 보낸다. 

순례자들은 이런 격려와 축하 속에 산티아고 대 성당에 도착해 너덜너덜해진 크레덴시알을 펼쳐 보이고 순례 증명서를 받는다. 시간이 맞는다면 성당의 미사에 참석하는데 미사의 끝부분에 대향로 보타푸메이로가 성당 천장에 매달려 흔들리며 연기를 피워내는 모습을 보며 감격한다. 이제 순례는 끝이다. 

하지만 많은 순례자들이 바닷가 마을인 피니스테라나 묵시아까지 내쳐 걷는다. 혹은 버스를 타고라도 그곳까지 다녀오는 것으로 순례를 마치는데, 중세의 순례자들 역시 바닷가까지 와서 몸을 씻고 죄사함을 받았다고 여기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하니 우리는 선배들을 나름 충실히 본받고 있는 셈이다. 차이가 있다면 현대의 순례자들은 이제 기차나, 버스 혹은 비행기를 타고 다음 목적지 혹은 집으로 돌아가지만 오래전 순례자들은 다시 걸어왔던 만큼의 험한 여정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교도, 야생동물, 강도의 위협을 뚫고.

한 달 넘는 시간 동안 길을 나서면 언제나 찾아 헤맸던 노란 화살표와 조개껍데기 문양이 없는 삶으로 돌아오면서 허전함을 느끼기도 한다. 자신도 모르게 두리번거리며 표식을 찾지만 이제는 더 이상 가야 할 방향을 가르쳐주는 비석도, 친절한 주민의 안내도 없다. 스스로의 표식을 찾아 떠나야 한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에 가끔 만났던 반대 방향으로 걷는 이들(이들을 위한 표식은 파란색 화살표다. 산티아고에서 출발지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은 그 표식을 떠나지 못해서 걷기를 멈출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순례는 끝났고 더 이상 표식은 없다. 하지만 카미노(길)도 끝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딘가로 여전히 걸어야 한다. 삶이라는 길 위로.  

2016년 6월 17일 금요일

고독한 책읽기-3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인류 역사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던 시기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도 세계 곳곳에서는 국가 간, 혹은 국가 내부의 전쟁이 진행 중이다. 엄밀한 의미로 한반도 역시 전쟁을 '쉬고' 있을 뿐 끝난 것은 아니다. 그렇게 도처에 널린 전쟁은 흔히 남자들의 것으로 여겨지고, 수많은 전쟁 문학과 영화는 남성의 관점에서 겪은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 단 하나, 이 책을 빼고.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허구를 다룬 소설이 아닌 실존 인물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옮긴 르포에 가깝다. 아니, 르포라고 조차 말하기 어렵다. 거기에는 아마도 어떠한 종류의 가공도, 의도도 없어 보인다. 그저 200여 명의 여성들이, 의사로, 위생병으로, 세탁 병사로, 전차부대 운전사나 심지어 전투기 조종사로 참여했던 자신들의 전쟁 이야기를 쏟아부었고, 저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성실하게 그녀들의 도구가 되어 주었다. 이 책의 페이지를 넘어갈 때마다 나는 종종 심호흡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아야 했다. 지속해서 읽기조차 힘든, 그러나 다시 책장을 넘길 수밖에 없는 이 책을 써 내려간 저자의 인내심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전쟁에 참여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쓰기 시작하면서, 점점 더 많은 이들의 연락을, 자신들의 목소리를 기록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그녀의 선택이 아니었을 것이다. 제단에 바쳐진 희생물이 되듯이 온전히 자신을 바쳤을 저자에게 노벨문학상이 충분한 경의가 되었기를 바라지만,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여성들, 전쟁 속에서 길을 잃었던 그녀들의 삶에는 어떤 위로가 되었을까.

"야간 당직을 서는 날이라..... 중환자실에 들렀어...... 대위가 누워 있더군...... 당직 들어오기 전에 다른 의사들이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미리 귀띔해준 대위였지. 아침까지 버티지 못할 거라고...... 나는 '그래, 좀 어때요? 도와드릴 일 있으면 말씀하세요.'라고 대위에게 말을 건넸어. 그러자 평생 잊지 못할 대답이 돌아왔지...... 대위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에 갑자기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어. '가운을 벌려서...... 당신 가슴을 보게 해줘요...... 아내를 못 본 지 하도 오래돼서......' 아직 입맞춤도 못해본 처녀에게 가슴을 보여달라니...... 너무 당혹스러웠어. 대위에게 대충 얼버무리고 도망치듯 병실을 빠져나왔지. 그리고 한 시간 후에 병실로 돌아갔어. 하지만 대위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어. 환하게 미소 지은 얼굴로......"

처참하고 끔찍한 순간들은 너무도 많다. 그러나 그 순간들조차 여성들은 엄마를 그리워하고, 손수건에 수를 놓고, 입지 못할 원피스를 만든다. 뭔가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을 끝없이 놓지 않으려 애쓰며 전쟁 한가운데를 관통해 간다. 비록 전쟁의 비극이 그녀들을 피해가지는 않았지만 여성이고자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구원받고 있었을 거라고 믿는다.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지만 저자는 이 이야기들을 담담히 기록할 뿐 무엇이 옳다 그르다는 식의 어떠한 의도도, 의견도 제시하지 않는다. 나는 이 책의 진정한 미덕을 크리슈나 무르티의 말을 통해 이해할 수 있었다. "평가가 들어가지 않은 관찰은 인간 지성의 최고의 형태다" 성실한 기록으로 이름 없었을 이들을 기억하고, 이름을 불러준 이 책이 오래도록 기억되기를 바란다.

인류 역사에서 전쟁이 없었던 시기는 얼마 되지 않지만, 실은 전쟁을 겪는 것은 일부에게만 해당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은 인류가 겪은 최대의, 최악의 전쟁이었다.

2016년 6월 10일 금요일

나의 산티아고記-8

좋은 사람, 김순진

그녀와는 참 많이 웃었다.      
순진과 만난 곳은 알토 돈 페르돈. 용서의 언덕이라는 곳이다. 철판에 새겨진 순례자들의 모습으로 유명한 곳이다. 카미노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미지 중의 하나이고, 그래서 엽서에서도 책자에서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그곳까지 혼자 오른 나는 The Way라는 카미노를 다룬 영화를 떠올리며 나름 감격스러운 순간을 보내고 있었다. 셀카를 찍는 내게 다가와 “사진 찍어드릴까요?”라며 이야기를 시작한 순진은 나보다 4살 아래. 차이가 난다면 난다고 할 수 있지만 연령대가 넓은 카미노에서는 만나기 힘든, 그나마 같은 세대였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길을 가게 되었다. 딱히 동행을 하기로 약속한 것은 아니었지만 순진과 나는 종종 같은 숙소에 묵거나 같은 곳에서 쉬는 일이 생겼다. 한참을 걷다가 이제 좀 쉬어서 맥주라도 한 잔 할까 싶어 들르면 그곳에서 마주치는 식이었다. 한 번은 각자 따로 길을 떠나 묵게 된 마을에 서너 개 정도의 알베르게 중 더 한적해 보이는 공용 알베르게로 들어가서 침대를 배정받았는데, 열 개 남짓 놓인 침대 중 하나에 낯익은 배낭이 보였다. 물어볼 것도 없이 순진의 배낭이었다. 그 옆에 내 배낭을 놓고 핸드폰을 확인하니 이미 메시지가 와 있었다. “언니, 어디예요? 전 지금 도착했어요.” 그래서 답장을 보냈다. “순진 바로 옆. 뭐해?” “맥주 마셔요.”

짐작 가는 곳이 있어 알베르게 밖으로 나가 맞은편 사설 알베르게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서 순진은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흠칫 놀라더니 웃음을 터뜨린다. “바로 옆이라고 해서 ‘어디서 나 보고 있나’ 하고 두리번거렸잖아요!” “ㅎㅎ 순진 바로 옆 침대에 자리 잡았지. 우린 취향이 너무 비슷한 것 같아.” 세대가 비슷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와는 대화가 참 잘 통했다. 해산물을 좋아하는 취향도 그랬지만 책 이야기, 영화 이야기, 여행 이야기 등등 대화거리가 끊이지 않았다. 가끔 알베르게에서 식사를 만들어 먹게 될 때면 조개, 홍합이 잔뜩 들어간 파스타를 함께 나누어 먹곤 했다. 파스타 삶은 물을 다시 써야 한다는 것도 순진을 통해서 배웠다. 나는 그동안 파스타를 엉터리로 먹고 있었던 것이다. 

이른 아침이면 커피 한잔에 나는 크롸상, 순진은 토르티야를 먹었다. 우리는 날이 갈수록 걷다가 멈추는 카페에서 종종 맥주를 마시곤 했다. 사실 약간의 술기운이 목적지까지의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출발하고 커피와 가벼운 아침을 먹고, 세 시간쯤 걷고 나면 배가 고프고 피로가 몰려왔다. 그러면 카페에 들러 맥주를 마신다. 다시 걷다가 점심을 먹고 또 맥주, 그리고 저녁엔 당연히 와인이지. 와인 한 병을 싸면 2-3유로, 비싸 봐야 10유로가 안 되는 돈으로 사서 반씩 나눠먹었다. 파스타를 만들어 먹기도 하고, 식당에서 사 먹기도 했지만 거의 매일 맥주나 와인은 빠지지 않고 마셨다. 이러다가 주정뱅이 되는 거 아니야 라고는 했지만 함께 마신 맥주와 와인이 없었다면 우리의 카미노는 조금 더 심심했을 것이다.


어느 날은 어떻게 해서 카미노를 오게 되었는지 얘기를 하게 되었다. 순진은 10년 전쯤 지금은 남편이 된 당시의 남자친구와 잠시 헤어지는 일이 있었고, 그때 마침 유럽 여행을 와서 한국인 민박집에 묵게 되었다.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여행 중이던 동생뻘의 남학생을 만났는데, 그가 산티아고 길을 걸을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온 순진에게 정말 산티아고를 간 그 남학생이 엽서를 보냈단다. 그 엽서를 받은 후로 ‘나도 한번 가보고 싶다’고 생각해 왔다. 둘 사이에 뭔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나의 짓궂은 추궁에도 순진은 정말 그런 건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나는 아직도 그렇게 믿고 있다. 그렇게 믿는 편이 더 낭만적이니까, 뭐.


산티아고 길의 후반부에 이제 혼자이고 싶다는 생각도 더 이상 없는 채,  순진과의 동행이 더 익숙하고 즐거워질 무렵 매일 아침 생각나는 노래를 부르곤 했다. 자칭 띰쏭(Theme Song)인 셈이었는데, 그게 간혹 순진을 괴롭게 하곤 했다. 어느 날은 내 입에서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가 흘러나왔는데 문제는 그 노래를 끝까지 모른다는 거였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얼씨구절씨구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잊자 잊자 오늘만은, 미련을 버리자” 대략 이런 식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를 듣던 순진은 아무래도 노래가 이상하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걷는 내내 머리 속에서 그 노래가 떠나지 않는다면서 나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내가 아침에 노래를 하나 부르기 시작하면 그날은 하루 종일 그 노래만 머릿속에 맴돈다며. 나중에는 그 노래 가사를 물어보려 한국에 있는 아버지에게 국제전화를 해야겠다고 할 정도였는데, 결론을 말하면 내가 노래 두 개를 중간에 이어 붙인 것이 문제였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와 “차차차”를 붙인 것이다. 그 사실을 발견하고 그녀는 무척 기쁘고 뿌듯해했다. 나 역시 순진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아서 참 다행이었다. 그 후론 순진은 내가 아침에 길을 나서며 부르기 시작하는 노래를 더 엄격하게 관리(?)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빈대에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하게 물리고, 좌절도 했고, 결국 함께 산티아고에 들어갔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고 쓰인 커다란 조형물 앞에서 서로의 사진을 찍어 주었고 산티아고 대성당에 함께 들어가 미사에 참석하면서 눈물을 흘렸고, 거기서 만난 또 다른 순례자 아저씨를 번갈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신발을 벗어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 성당 주변에서 순례자들을 만날 때마다 함께 울었다. 누군가 왜 우느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어려웠겠지만 다행히 어느 누구도 그렇게 묻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하게 서로를 안고 함께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설명할 수 없지만 그 순간에는 적어도 우리는 완벽하게 같은 마음이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무엇보다도 그녀와의 동행이 좋았던 것은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그녀의 타고난 품성 덕이었다.  무언가를 함께 결정해야 할 때가 되면 순진은 거의 언제나 “언니가 좋은 대로 해요.”라고 말했다. 어디서 쉴까, 뭘 먹을까, 알베르게는 어디로 갈까, 또 아침엔 몇 시에 출발을 할까. 많은 순간에 순진은 나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 유일하게 순진이 자기주장을 강하게 편 때는 우리 모두 빈대로 고생하느라 호텔에서 욕조 목욕을 하고 옷을 소독하는 일이 간절했을 때 돈 때문에 주저하는 내게 “언니는 알베르게 숙박비만큼만 내요. 나머지는 내가 낼 테니까.”라며 호텔에 묵을 것을 설득했을 때뿐이었다.


산티아고에서 바닷가 마을인 피니스테라, 그리고 묵시아까지 동행한 우리가 마지막으로 헤어진 것은 묵시아에서의 하룻밤을 함께 보내고 나서였다. 하루 차이로 나보다 먼저 산티아고로 돌아가 포르투갈에서 친언니를 만나기로 한 순진과 이제는 헤어지는 것이다. 이른 아침 출발하는 버스를 기다리며 ‘아, 이젠 정말 안녕이네. 하지만 다시 또 만날 거야’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따뜻한 포옹을 마지막으로 버스를 타고 떠난 순진은 친언니와 함께 여행을 하던 포르투갈에서 내내 카미노가 그립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나 역시 카미노를 생각하며 독일로 향했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여행을 떠났다.

2개월쯤 지나 우리는 서울에서 다시 만나 카미노를 그리워하며 맥주를 마셨다. 나는 다시 인도로 돌아왔고, 순진은 취직을 하고 일상을 시작했다. 그런 그녀에게 며칠 전 엽서를 띄웠다. 혹시 언젠가 그녀가 인도로 여행을 오게 된다면 내가 보낸 그 엽서가 기억될 것이다. 그런 것을 기억해 주는 순진은 참 좋은 사람이다. 

2016년 6월 5일 일요일

지금 여기, 다람살라 그리고 인도-1


알 수 없는 인도의 우편 체계

인도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무래도 우편을 통해 편지나 엽서 혹은 소포를 보내고 받는 일이 많아졌다. 한국에서라면 고작 카드 고지서라든가 선거 공보물 따위가 우편함에 꽂혀 있었을 텐데. 아무튼 인도에서는 구할 수 없는 물건, 한국 식재료나 책 같은 것들을 한국에 갔을 때 직접 부치기도 하고, 친지에게 부탁해 받기도 하기 때문에 우체국을 드나드는 일이 종종 생길 수밖에 없다. 또 요즘은 인도라고 해도 인터넷 이용이 쉬워져서 이메일을 통해 소식을 주고받거나 채팅을 해도 괜찮지만, 그래도 외국에서 보낸 엽서를 받는 기분이 남다르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가끔씩이라도 친구들이나 가족에게 엽서를 보낸다. 

이렇게 우체국에서 제공하는 편의가 나의 생존과 사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나로서는 어느샌가 우편 체계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인도에서 지난 5년 동안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봐왔기 때문에 지난가을 유럽에 가서는 가는 나라마다 우체국에 가서 엽서를 부쳐보는 것으로 그 나라의 시스템을 시험해 보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물론 내가 엽서를 보내봤던 영국, 프랑스, 스페인 모두 인도보다 빠르고 정확했다. 엽서를 받은 한국의 친구들은 "확실히 스페인이 인도보단 엄청 빠르던데."라고 감탄했다. 물론 그중에도 사라진 엽서가 있었고 그것이 보내는 쪽의 문제인지, 받는 쪽의 문제인지는 규명이 필요할 수 있지만, 경험적으로, 이성적으로 유독 인도로 보낸 엽서 4장만 도착하지 않았다면 그것 역시 인도의 우편 체계에 결함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과연 인도는 어떤 우편 체계를 갖고 있길래 이런 결함이 있을까. 사실 이것을 어떤 '체계'의 결함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내가 경험한 인도에서의 우편과 관련된 문제는 주로 '사람'에 의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2007년 처음 인도 여행을 왔을 때도 당연히 한국으로 꽤 열심히 엽서를 보냈다. 하지만 2-3주가 지나도 받지 못했다는 사람도 꽤 많았고, 한 달이 넘어서야 받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의아해하는 내게 바라나시에서 만난 여행자가 자기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아, 인도에서 우표를 사서 엽서를 부칠 때는 우체국 직원이 소인을 찍는지 확인을 하고 와야 해요. 난 그걸 확인 안 하고 우체국에서 나왔다가 놓고 나온 물건이 있어서 다시 갔더니 직원이 내가 좀 전에 붙인 우표를 조심스럽게 떼고 있더라고요." 말하자면 그 여행자가 낸 우표값을 그런 식으로 떼먹는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여러 차례 인도의 우편 체계가 그다지 믿을만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는 엽서를 보내면서도 '제대로 배달되지 못해도 어쩔 수 없지' 이런 마음이었고, 친구들에게도 '내가 보낸 엽서를 못 받아도 인도의 우편 체계 때문이지 내 탓이 아니야'라고 일러두었다. 그렇게 되니 반대로 엽서를 보내지 않으면 서운해할만한 사람들도 내가 보내지 않은 것인지, 인도의 우편 체계 탓인지 알 수 없어서 '그러려니' 하게 되는 장점도 있었다.

하지만 인도에서 살게 된 후로 이 문제는 '그러려니'하고 넘어갈 수 없게 되었다. 모처럼 한국에 갔을 때 사들인 된장, 고추장, 김, 미역, 멸치 따위를 손수 포장해 보통 3개월이 걸리는 선편으로 부치고 나면 대개는 인도로 돌아온 후에도 1-2개월은 기다려야 받을 수 있다. 한 번은 그렇게 기다려 받은 멸치 봉투에 쥐가 만든 것이 분명한 구멍이 손가락 세 개는 들어갈 정도의 크기로 뚫려 있었다. 멸치의 손실은 3분의 1 정도였지만 그 정도라면 쥐가 분명 봉투 안에 들어가서 식사를 했을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니 도저히 나머지도 먹을 수 없어서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에게 먹이겠다는 티베트 친구에게 건네주고 말았다.

사실 주로 인도로 보내는 우편물에서 발생하는 손실은 이렇게 동물에 의한 것보다는 사람에 의한 것이 많다. 우편 박스가 찢어져 있거나, 넣어 보낸 물건, 특히 음식물이 사라지거나 하는 일은 늘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먼 북소리'에서 이탈리아의 우편 체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탈리아의 우체국 직원이 '오늘 저녁엔 소바를 먹어볼까' 하면서 자신의 국수를 슬쩍하지는 않을 텐데, 왜 감쪽같이 사라지는지 모르겠다며 한탄했지만, 인도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다른 지역은 어떤지 몰라도 다람살라에서는 어쨌든 소포로 보낸 많은 음식물들이 양이 줄거나 사라지기 때문이다. 어떤 친구는 라면 봉지가 뜯긴 채, 일부를 먹고 나머지가 들어 있는 채로 소포를 받은 적도 있고, 분명히 넣은 물건이 감쪽같이(라고 하기엔 너무 명백하게 상자가 뜯긴 흔적을 간직한 채) 사라진 경우도 있을 정도다.

그런데 그냥 내용물이 사라지는 것만이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인도의 우편 체계가 '사람'의 문제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엄청난 인내심을 갖지 않고서는 울화가 치미는 우체국 직원들의 일하는 방식 때문이다. 실례로 나만해도 얼마 전에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부탁해 항공편으로 책을 받게 되었다. 친구는 한국의 우체국에서 4-5일이면 도착할 거라는 말에 비싼 EMS로 소포를 부쳤지만, 그 소포는 통관을 거치는 데만 11일이 소요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인도 세관에서 11일 동안 책이든 이 소포를 어떻게 관찰했는지 알 수는 없다. 물론 인력이 부족해서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야 하겠지만, 정작 내가 사는 다람살라의 우체국에서 보여준 태도를 보면 인력 부족만이 문제는 아닐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인도의 다른 지역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다람살라의 우체국에서는 편지나 엽서, 서류 같은 것은 배달을 해주지만 소포는 배달을 하지 않고 수신자에게 전화를 걸어 우체국에서 찾아가도록 한다. 그런데 친구가 보낸 이 EMS 소포는 우체국에 도착하고 7일이 되도록 내게 아무런 통보가 없었다. 뒤늦게 인터넷 조회로 도착 사실을 알게 된 내가 우체국에 찾아가 "내 소포가 도착했다고 하는데..."라고 말했지만 직원들은 합심한 듯 "한국에서 온 소포는 없다"고 답했다. 심지어 그들의 뒤편에 보이는 Korean Post 상자를 가리키며 "저거 아니야?"라고 해도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인도의 우체국에서는 여기서 물러나면 아무것도 받을 수가 없다. 집요하게 "저 상자 확인해봐 줘"라고 조른 후에야 그들은 그 상자가 한국에서 왔고, 받는 사람이 나로 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내 상식으로는 이런 경우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든가, 적어도 '아, 여기 있었네?'라며 쑥스러워하거나 혹은 당황할 법도 하지만 인도인들의 대범함은 그런 모습을 절대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아니 그들에게는 정말 아무 일도 아니기 때문에 태연하게 상자를 내어주고 서명을 요구한다. 인도에 살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이 모든 과정이 울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지만 이제는 무사히 소포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부자가 된 기분이 든다. 게다가 내용물을 확인해 보니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고 온 것이지 뭔가. 이 정도면 정말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새책을 잔뜩 받았으니 당분간 이 행복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도의 우편 체계라는 점에서 본다면 한없이 느린 일 처리의 속도라든가, 직원들의 불성실한 업무 태도라든가, 또 정말 체계의 문제가 여전히 많다. 우편물을 부치거나 받으러 갔다가 전기가 나가서, 인터넷 시스템이 다운돼서 허탕을 친 경우도 부지기수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요즘엔 붙여진 우표를 몰래 떼는 일은 줄어든 것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오래 걸리긴 하지만 인도에서 한국으로 보낸 엽서들이 그럭저럭 잘 도착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스페인에서 인도로 부친 엽서 4장, 이것은 아마 영영 찾지 못할 것 같다. 어딘가의 우편함 바닥에 깔려 잊혀 가고 있거나, 배달이 귀찮아진 인도 배달원이 '아이고 이렇게 작은 엽서까지 어떻게 다 갖다 준단 말이야'하고 어딘가의 쓰레기 더미에 던져버렸을지도 모른다. 영영 시공간 속으로 사라져버린 4 장의 엽서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인사를 보낸다.  

2016년 5월 24일 화요일

[고독한 책읽기] 2. 바람의 기록 / 박경희


옆방에 사는 지혜 씨가 자신의 스승님의 친구인 한국분이 쓰신 거라며 책을 줬다. 여기 한국인들이 많이 오는 식당이나 카페에 기증하고 있는데 록빠 카페에도 놔달라는 거였다. 그래서 내가 가장 먼저 읽게 되었는데, 2007년 무렵 맥간에 왔던 한 남성이 그때 만나 티베트어를 배우던 티베트 여성을 6년이 지난 후 꿈에서 떠올리고 그녀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얘기다. 그녀를 힘들게 찾아내지만 티베트를 위해 분신을 결심한 그녀를 막지 못하고 그 모습을 목격하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소설적으로 잘 쓰였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평가하지 못하겠다. 그런 평가를 하기 이전에 마지 내 가족이나 친구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책을 읽는 것처럼 감정이 이입되어,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내가 밥을 먹던 식당, 내가 걷던 거리, 내가 만났던 듯한 사람들, 내가 겪은 것 같은 사건들… 그런 속에서 마지막 주인공 여성이 분신하는 대목은 마음이 한없이 아팠다. 언젠가는 티베트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 역시도 글로 쓰고 싶었지만, 그 이야기가 결국은 아프고 슬플 것이라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아쉬움이 있다면 좀 더 구체적인 각각의 티베트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았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개별적 존재의 구체성을 상실할 때 인간성 역시 상실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나에게는 이 이야기가 슬프고 마음이 아프지만, 티베트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얼마나 생생하고 구체적인 것으로 마음에 다가올지 모르겠다. 

‘그들의 이름을 불러 주라’ 
나치에 희생된 유태인들을 기리는 예드 바쉠 Yod Vashem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예드 바쉠이란 '이름을 기억하게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곳에는 희생자들의 이름, 살았던 곳, 태어난 곳 등 그들에 관한 모든 기록이 보관되어 있다. 그들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사랑하고, 질투하고, 노래하고, 춤췄던 사람이었음을, 개성과 역사와 기억을 지닌 존재였음을 기억할 때에만 우리는 그들에게 깊이 공감할 수 있다. 그들을 희생자 일반, 어느 국민 일반, 계층 일반으로 만들 때 우리는 그 개별성을 놓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 자신과 그들 사이의 깊은 연관성 역시 잃어버리는 것이다. 2차 대전 당시 그토록 많은 희생을 겪었던 유태인들이 지금은 팔레스타인에 떨어지는 폭탄을 불꽃놀이 마냥 즐기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지금의 유태인들에게는 팔레스타인인들의 개별성이, 인간성이, 이름이 불려지지 않는다. 그저 추상으로서의 악, 위험 그 자체이며, 자신들과 단절되고 절멸시켜야 할 어떤 것인 것이다.

안네의 일기가 그토록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사랑받았던 것은 그 이야기가 특별해서가 아니다. 그 당시 나치를 피해 많은 사람들이 숨어 지내고, 힘든 시간을 혹은 더 참혹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의 일기를 통해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한 인간, 한 소녀를 만났고 그녀의 고통, 절망, 소녀다운 사랑과 희망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네는 더 이상 이름 모를 수백만의 유태인 희생자 중 하나의 숫자가 아니라 우리가 아는, 공감하고, 사랑하는 한 어린 소녀가 되었다.

우리가 진정으로 마지막까지 해야 할 일은 세상의 이름 없이 사라지는 것들, 존재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지켜보아주고, 불러주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2016년 5월 15일 일요일

고독한 책읽기-1 지지 않는다는 말 / 김연수

열심히 책을 읽던 시절이 있다. 지금보다 한참 젊을 때다. 그때는 주로 소설을 읽었다. 그러다가 점점 나이가 들면서 소설이 아닌 책을 읽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도입부에 책만 읽는 언니를 보며 따분해진 앨리스가 나온다. 앨리스의 표현에 따르면 언니는 '그림도 대화도 없는 책'을 읽고 있다. 그 책에 내가 등장했다면 나도 아마 앨리스를 따분하게 만들었으리라.

소설가들께는 미안하게도 소설보다는 인문학 책과 산문집을 선호하게 되었는데, 김연수의 '지지 않는다는 말'도 산문집이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도 몇 권 읽었지만, 다시 미안하게도 소설보다는 산문이 내 스타일이다.

"그러다가 어느 결엔가 이 우주가 참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됐는데, 그 순간 나는 고독을 경험했다. 고독은 전혀 외롭지 않았다. 고독은 뭐랄까, 나는 영원히 살 수 없는데 이 우주는 영원히 반짝일 것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의 감정 같은 것이다." - 도시에 공급하는 고독의 가격을 낮춰 주기를 中

이 감정을 나는 완벽히 이해했다. 아니 완벽히 경험했다. 중학생 시절, 우주와 시간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단순히 상상이 아니라 무한한 우주의 이미지와 그 안에서 티끌이 되어 사라지는 나, 그리고 내가 존재하기 전에도, 후에도 아무런 상관없이 무한하게 펼쳐지는 시간의 흐름을 공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느낌이 고독이라는 걸 이 책을 보고 알았다. 하지만 중학생이던 나는 그저 두렵기만 했고, 두려움을 설명도, 이해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울면서 잠이 들었다.

이제는 우주의 무한과 내 존재의 유한을 생각해도 그렇게 두렵기만 하지는 않다. 윤회를 믿거나 구원을 기다려서는 아니다. 어차피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체념 때문만도 아니다. 그보다는 비록 티끌에 불과하지만 나 자신이 이 우주의 일부라는 것을, 그래서 우주의 어딘가를 끝없이 여행하리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 것 같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 다람살라는 서울은 물론이고 한국의 어지간한 곳보다 별을 쉽게 볼 수 있는 곳이다. 1800미터에 가까운 해발 고도와 히말라야의 맑은 공기 탓이다. 어느 날 밤 자다 깨어 무심코 발코니에 나가 하늘을 올려다본 적이 있다. 무수한 별들이 머리 위로 펼쳐져 있었는데, 이들이 분명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방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누워서도 나를 감싸고 있는 별들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 나는 혼자였지만 그것이 고독이라면, 전혀 외롭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만난 적도 없는 사람과 완벽하게 감정을 공유하는 일이 책읽기에서는 발생한다. 김연수는 내게 그런 작가다.

2016년 5월 13일 금요일

고독한 책읽기-0 시작하며

김현의 책 [행복한 책읽기]가 출간된 것이 1992년이라고 한다. 내가 그 책을 읽은 것도 아마 그 무렵일 것이다. 출간 소식을 듣고 찾아서 사 본 것으로 기억한다.

나의 책 읽기, 혹은 책 일기를 시작하며 뭐라고 이름을 붙일지 생각하다 행복한 책읽기도, 또 어느 티브이 프로그램인지, 누군가의 책 제목인 즐거운 책읽기도 모두 좋았다. 하지만 그 제목을 그대로 갖다 쓰고 싶지는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게 책읽기는 참으로 고독한 시간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이 자신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내게는 참 소중한 시간이다.

나를 자신 속으로 들어가게 할 수 있는, 고독한 책읽기의 시간이 기다려진다. 

2016년 5월 12일 목요일

나의 산티아고記-7

아야코와 츠요시, 그리고 나의 마리아 님

"너는 카미노를 왜 걷게 됐니?"
산티아고로 가는 길에 흔히 주고받는 질문이다.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어서, 가톨릭 신자라서, 예전부터 와보고 싶어서 등등 많은 이유를 접할 수 있다.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마지막으로 순례를 마쳤다는 증명서를 발급받을 때도 종교, 영성, 스포츠 등의 순례 이유를 고르게 돼 있다. 그러니까 누구나 당연하게도 집과 가족, 친구를 떠나 스페인의 시골길을 수백 킬로미터씩 걸을 때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하지만 나는 그들만큼 분명하고 간절한 이유를 가진 순례자는 만나지 못했다. 아야코와 츠요시 부부.

두 사람을 알게 된 건 일본어가 능통한 윤 선생님 때문이었다. 이미 나와는 안면이 있던 윤 선생님이 한국 중년 남자분 두 분과 일본인 커플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 우연히 합석을 하게 됐다. 다들 길을 걷다가 만난 사이이다. 그 자리에서 인사를 나누게 된 일본인 부부가 바로 아야코와 츠요시다. 10살 차이가 나는 이 부부는 영어도 잘 못하고, 걷기도 잘 못했지만 씩씩하게 길을 걷고 있었다. 유난히 속도가 빠른 한국의 조 선생님(중년 남자 분 중 한 분이었는데 정말 잘 걷는 분이었다.)을 첫날부터 만나, '저 사람만 놓치지 않으면 우린 잘 하고 있는 거야'라며 서로를 다독이며 걸어왔다고 한다. 남들보다 걷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더 일찍 출발하고 늦게 까지 걷는다는 그들은 저녁이 되어 숙소에서 조 선생님을 마주치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활달한 아야코와 점잖고 소탈한 츠요시를 보고 '좋은 사람들이구나' 했을 뿐 특별한 점은 느끼지 못했다.

얼마 후 윤선생님께 들은 그들 부부의 이야기에 따르면 두 사람이 순례를 떠난 이유는 츠요시의 병을 낫게 해달라는 기원을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평상시엔 괜찮지만 평생 앓아야 하는 병이었다. 일본에서 버거 프랜차이즈의 점장과 아르바이트 생이로 만난 아야코와 츠요시는 아야코의 적극적인 대시로 결혼에 이르렀다. 물론 츠요시의 병에 대해서 알고도 한 결혼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산티아고로 가는 이 길을 걸으며 기도를 하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순례에 나섰다. 전날 묵은 성당에서 나눠준 십자가 목걸이를 정말 기쁜 표정으로 걸고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로 길에서 마주치는 그들이 더 반갑고 궁금했는데, 그들은 여전히 조 선생님을 자신들의 성 야고보(산티아고에 묻힌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성인. 산티아고라는 말이 성 야고보라는 말이다.)라고 부르며 열심히 그분을 찾아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졸지에 성 야고보가 된 조 선생님은 다소 난감한 표정이긴 했지만.

반가운 마음이야 다른 순례자들을 만날 때나 진배없지만, 아니 사실 조금 더 반갑고, 꼭 순례를 잘 마쳐서 정말로 병이 낫기를 바라게 되었다. 비록 일본어를 못하는 나와 영어를 못하는 그들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기는 어려웠고 그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이 아쉽기는 했다.

수십일이 지나고, 수백 킬로의 풍경과 사람과 이야기가 지나가고 드디어 산티아고에 도착했다는 감격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일정에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내친김에 순례자들이 몸을 씻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바닷가 마을 피니스테라에 이어 묵시아를 찾았다. 그곳에서 순례자들은 고요했다. 진짜 순례의 끝이 그곳에 있었고 나 역시 바다의 소리를 듣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그곳에서 아야코와 츠요시를 다시 만났다. 혼자 바닷가에 앉아 있던 나를 발견하고 다가온 아야코에게 산티아고 길이 어땠냐고 물었더니 "Body tired, but heart more hard"라고 답했다. 육체와 정신의 고통이 어쩌고 저쩌고 40일 내내 마음속으로 무수한 이야기를 썼다 지웠던 내가 부끄러울 만큼 간결한 대답이었다. 나도 그랬어. 우린 서로 마주 보며 heart가 hard했다는 말을 반복하며 울었다.(산티아고에 도착한 순간부터 나는, 아니 우리는 울보가 되었는데, 산티아고에서 순례자들끼리 만나면 껴안고 울기부터 했다. 이유를 설명하기는 참 어렵지만.) 그리고는 자신은 산티아고에 가면 뭔가 편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고 그래서 내심 실망하고 있었는데 묵시아에 와서 많이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서툰 영어와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일본어를 섞어서 이야기했다. 그러고는 헤어지기 전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로 마지막 기념사진을 찍었다.

카미노를 걸으면서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듯한 순간을 많이 겪었지만 그날 해질 무렵 아야코와 울면서 나눈, 대화라고 할 수도 없는 이 대화가 내 마음속의 무언가를 녹여버린 결코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되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산티아고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을 때 아야코와 츠요시를 다시 만났다. 나는 혹시나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준비해 두었던 달라이 라마의 말씀이 적힌 책갈피를 건넸다. 아야코는 내게 어제 츠요시와 함께 자신들이 마리아를 만났다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내게 아야코는 "네가 우리 마리아야"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말했다. "우리는 카미노에서 성 야고보도 만났고 마리아도 만났어. 그러니까 우리는 충분히 행복해."

아야코와 츠요시는 다른 성지로 이어서 순례를 떠났고 나는 산티아고를 떠났다. 그때 묵시아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을 가끔 들여다본다. 아야코, 네가 나의 마리아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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